사건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우리는 ‘왜 이번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8살 밖에 안된 체첸 소녀가 폭탄을 배에 두르고 자살 테러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단순히 테러라고 치부하고 말면 안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초점을 맞춰보자.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식민지가 없었던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처럼 본격적인 식민지 정복 정책을 시작한다. 터키 전쟁과 카프카즈(코카서스)전쟁이 그것이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카프카즈 전쟁은 1917년 혁명까지 계속되었지만, ‘피착취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소비에트 혁명 정권의 탄생으로 잠잠하게 되었다. 그 후 카프카즈의 여러 국가들(그루지야,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이 소비에트에 합류하였지만, 유일하게 러시아와 타협을 거부하고 연방의 일원이 되지 않은 나라가 바로 체첸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을 민족과 언어가 전혀 다른 인구쉐티아와 강제로 통합시켜 체첸-인구쉐티아 자치 공화국을 설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체첸과 러시아의 갈등은 본격화되었고 체첸은 러시아와 인구쉐티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민족 해방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후 연방 정부와의 전쟁으로 그로즈니(체첸 수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러시아 군대에 의한 인권 유린과 살인, 강탈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체첸인들 마음 속에 러시아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는 점점 증폭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의 여론에서도 러시아가 주장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 결과 러시아의 강압적 태도를 비난하며, 체첸 독립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서방 언론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다시금 세계에 입증해야 했다.

이번 사건 역시 그 이면에 서방을 겨냥한 러시아의 음모가 감추어져 있다. 즉 체첸인들의 위험성과 잔인함을 강조하여, 대외적으로 체첸에서의 전쟁은 테러집단과 벌이는 정당한 행위임을 서방 언론에 표명하고, 대내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그런 체첸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거듭 확인시켜(실제로 사건 이후 러시아인들의 체첸 반감은 정점에 이르렀다), 궁극적으로 앞으로 있을 대선에서의 재선을 노린 푸틴의 전략이 담긴 것이다. 러시아는 체첸을 포기할 수 없다. 러시아 경제의 동맥인 석유를 수송하는 송유관이 카스피해를 거쳐 바로 체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들을 우리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 체첸인들을 단순한 테러집단으로 매도하는 오만을 범하지 말자.      

 
 
 
 
10월 23일 21시 05분. 인기 뮤지컬 『노르드-오스뜨』가 공연되고 있는 모스끄바 시내 문화 궁전 콘서트 홀 안으로 바라예프 지휘하에 50명의 체첸인들이 잠입했다. 이들은 공연을 보러 온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폭탄과 총기로 그들을 위협하며,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체첸전쟁의 종결을 요구했다. 10월 26일 새벽 5시 32분. 사상 유례없는 진압 작전(작전명-쉬뚜름)으로 500명 이상의 인질이 구출되었다. 남자 32명과 여자 18명(대부분이 체첸전쟁 미망인)으로 구성된 테러범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117명의 인질들이 진압시 사용된 독가스에 중독돼 숨졌다. 현재까지도 646명이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며, 이들은 외부와 격리된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서방의 언론들은 과잉진압과 현장조작의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테러 진압에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러시아 언론 또한 작전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 채, 비록 불가피한 희생자는 있었지만 야만적이고 잔인한 체첸 테러리스트로부터 그들을 구해준 푸틴을 찬양하기에 바쁘다.


사건의 객관적 이해를 위해, 우리는 ‘왜 이번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8살 밖에 안된 체첸 소녀가 폭탄을 배에 두르고 자살 테러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우리는 단순히 테러라고 치부하고 말면 안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초점을 맞춰보자.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식민지가 없었던 러시아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처럼 본격적인 식민지 정복 정책을 시작한다. 터키 전쟁과 카프카즈(코카서스)전쟁이 그것이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카프카즈 전쟁은 1917년 혁명까지 계속되었지만, ‘피착취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소비에트 혁명 정권의 탄생으로 잠잠하게 되었다. 그 후 카프카즈의 여러 국가들(그루지야,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이 소비에트에 합류하였지만, 유일하게 러시아와 타협을 거부하고 연방의 일원이 되지 않은 나라가 바로 체첸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을 민족과 언어가 전혀 다른 인구쉐티아와 강제로 통합시켜 체첸-인구쉐티아 자치 공화국을 설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체첸과 러시아의 갈등은 본격화되었고 체첸은 러시아와 인구쉐티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민족 해방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 후 연방 정부와의 전쟁으로 그로즈니(체첸 수도)는 쑥대밭이 되었고, 러시아 군대에 의한 인권 유린과 살인, 강탈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체첸인들 마음 속에 러시아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는 점점 증폭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의 여론에서도 러시아가 주장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 결과 러시아의 강압적 태도를 비난하며, 체첸 독립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서방 언론에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다시금 세계에 입증해야 했다.

이번 사건 역시 그 이면에 서방을 겨냥한 러시아의 음모가 감추어져 있다. 즉 체첸인들의 위험성과 잔인함을 강조하여, 대외적으로 체첸에서의 전쟁은 테러집단과 벌이는 정당한 행위임을 서방 언론에 표명하고, 대내적으로 러시아인들에게 그런 체첸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거듭 확인시켜(실제로 사건 이후 러시아인들의 체첸 반감은 정점에 이르렀다), 궁극적으로 앞으로 있을 대선에서의 재선을 노린 푸틴의 전략이 담긴 것이다. 러시아는 체첸을 포기할 수 없다. 러시아 경제의 동맥인 석유를 수송하는 송유관이 카스피해를 거쳐 바로 체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들을 우리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 체첸인들을 단순한 테러집단으로 매도하는 오만을 범하지 말자.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