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 장희빈 일화로 유명한 ‘인현왕후전’의 주인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공개됐다. 이 능의 명칭은 ‘명릉’으로 이로써 조선 왕실의 족분(族墳) 서오릉의 다섯 능이 전부 개방됐다.

서오릉은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이 있다’는 뜻으로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족분이다.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하며 1970년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됐다.
서오릉은 1457년(세조 3년) 경릉으로 시작해 1757년(영조 33년) 홍릉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서오릉에는 축조시기 순서대로 △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 5능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경릉과 명릉의 구조가 특이하다.

경릉은 제7대 왕인 세조의 왕세자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묘이다. 전통적 사고(思考)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경우 왼쪽이 상석, 오른쪽이 하석이지만 죽은 사람의 경우 오른쪽이 상석, 왼쪽이 하석이 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경릉은 왼쪽에 덕종의 능, 오른쪽에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의 능이 세워져 있다. 또한 덕종이 묻혀있는 왕릉의 석물은 간소한 반면 소혜왕후가 묻혀있는 왕비릉의 석물은 모두 왕릉 제도에 맞게 설치돼 있다.

덕종에는 난간석, 망주석, 무인석이 없고 석수도 1쌍만 설치돼 있다. 능침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문인석 1쌍이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해 소혜왕후릉은 12칸의 난간석, 석양과 석호 2쌍이 갖춰져 있으며 다른 왕릉의 석물 배치와 큰 차이가 없다.
 이 이유인 즉 덕종은 왕세자의 신분으로 승하했지만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제9대 왕 성종으로 즉위한 소혜왕후의 아들 자을산군은 일찍 생을 마감한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덕종)를 추존(사후 왕의 칭호를 내림)했고, 이에 소혜왕후는 세자빈에서 인수왕비로, 이어 대왕대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남편보다 상석에 묻힌 왕비가 됐다.

또 하나의 특색있는 능으로 꼽히는 명릉은 제19대 왕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능, 그리고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능은 쌍릉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오른쪽 언덕에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이 있다.
이 능의 형태에 관해 학계의 논란이 있다. 동역이강릉이냐, 쌍릉과 단릉이냐의 문제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동역이강릉은 단순히 하나의 언덕 위에 세워지는 쌍릉이나 단릉과는 달리, 같은 능 이름과 같은 능역을 가지나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세운 것을 말한다. 왼쪽 언덕에 숙종과 인형왕후의 비가,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비가 세워져 있는 양식만 보더라도 명릉은 동역이강릉이다. 하지만 오른쪽이 상석, 왼쪽이 하석이라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쌍릉과 단릉으로 나뉘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명릉이 모호한 형태를 취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원왕후가 15세에 왕비로 간택돼 숙종이 승하했을 당시에는 34세였다. 제20대 왕인 영조가 즉위했을 때 대왕대비에 오른 그녀는 생전에 숙종 곁에 묻히길 원하여 명릉 주위에 미리 묏자리를 정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 72세로 승하하기 얼마 전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했다.

두 개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벌이려면 막대한 국고를 사용해야 했고 인원왕후가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둔 묏자리에 능을 조성할 경우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해야 했다. 이에 영조는 명릉 우강(右岡)에 인원왕후릉을 단릉으로 만들 것을 명한다. 따라서 능호 및 정자각이 생략되고 묘표도 숙종과 인현왕후의 묘표와 함께 같은 비각에 나란히 서있게 된 것이다.

인원왕후와 명릉에 묻히게 한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은 홍릉으로 불려졌다. 본래 홍릉을 조성할 때 정성왕후 능의 오른쪽을 비워 영조의 묏자리로 지정됐으나, 이후에 영조는 계비 선의왕후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의릉에 안장됐다.
이 외에 서오릉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릉,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익릉이 있다.  창릉은 세조의 둘째아들이자 덕종의 아우인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묘이며 익릉은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이다.

익릉은 숙종이 능석물을 간소화하는 교령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됐다. 따라서 익릉의 석물은 명릉의 석물에 비해 척수가 크고 장명등도 사각지붕이 아닌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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