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칼끝에서 나온다”라는 말은 왕권 통치력을 반영시킨 것이다.
왕조 때 모든 권력은 도성에서 시작되었고 도성은 왕궁의 주인인 왕에 의해 장악 되었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왕릉의 위치선정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는 한양 80리(현행거리로는 백리)안에다가 왕릉을 택지했다.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경우 능행중인 왕은 당일 안에 도성과 왕궁을 장악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통치권 장악을 위한 왕릉선정 조건에 속한다.

이 같은 도성80리 선정조건 보다 더 중요시 되었던 택지조건이 조선왕릉에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풍수지리다. 서오릉에 소재한 의경세자릉(경릉) 택지조건을 살펴보아도 왕릉택지조건은 이같이 드러난다. 의경세자가 요절한 세조3년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찰해보면 9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는 나라의 국사가 마비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동년 9월 7일 실록에 적힌 세조의 어명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그(의경세자)무덤 안의 일은 마땅히 한껏 후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세조왕심 속에는 생기(生氣:상생의 땅기운)가 한껏 풍부한 곳을 택지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조선왕조의 역대27대 왕들은 한결같이 풍수신봉자이었다. 도성풍수는 왕조국운에 영향을 주고 명당왕릉은 왕궁 용상에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기를 공급받는 것이 명당왕릉이라는 풍수논리에 따라 생기저장 탱크에 해당되는 강(岡:둥굴게 생긴 작은 동산)위에 왕릉 봉분을 조성했던 것이 조선왕릉의 특징이기도 했다.

왕심의 이러한 풍수시각은 왕릉의 위치선정과 구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서오릉을 택지한 세조 때는 새로운 왕릉양식까지 창출하게 된다.
세조 이전의 조선왕릉들은 하나의 강 위에 왕과 왕비릉을 조성한 쌍릉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세조왕릉서부터는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독립된 강을 하나씩 차지하는 동역이강(同域異岡)양식이 등장했다. 동역이강은 강이 두 개이기 때문에 쌍릉양식 보다 생기 저장탱크를 곱빼기로 갖고 있는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제1대 태조에서 제6대 단종에 이르는 적법왕통을 찬탈한 세조는 항상 용상불안에 시달렸다. 이에 대한 대비책에서 생기를 더욱 강력하게 받는 새로운 왕릉양식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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