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에서 스필버그는 외계인과의 조우를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그렸다. 자신이 제작하고 조 단테가 감독한 「스몰 솔져」에서는 ‘외계와의 만남’(여기서는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 아니라 장난감들이지만, 인간의 세계와 다르다는 점에서 외계라고 할 수 있다)이 초래할 수 있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외계 존재들과 호의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스필버그는 「E.T.」가 나오기 5년 전인 1977년 그 자신 최초의 SF영화 「미지와의 조우」(원제: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를 만들었다. 이것은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으로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단순히 호의적인 것을 넘어서 우주 시대를 맞는 인류에게 희망적 메시지의 전달자로까지 비추어진다. 스필버그가 외계에 대해 갖는 호감은 이 작품에서부터 최근의 「A.I.」까지 줄곧 이어져 그 자신 작품 성향의 일관된 축을 이룬다.

반면 팀 버튼이 판타지와 SF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그렇게 장밋빛이 아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가위손」에서도 그는 슬프고 비극적인 결말을 택했다.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배척 당하는 인조인간 에드워드를 통해, 참으로 ‘이상한 동물’인 인간의 여러 모습들을 까뒤집어 보인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 외계와 조우하는 인간의 태도는 동화적 분위기와 줄거리 속에서도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특별한 주연 배우 없이 여러 캐릭터들이 뒤죽박죽으로 등장하는 「화성 침공」에서도, 버튼은 공상적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현실 풍자의 감각을 잃지 않는다. 화성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에 나타나고 미국 대통령은 비상 안보회의를 소집한다. 군 수뇌부는 극비의 비상 경계 태세를 권유하고, 공보비서는 이번 계기를 대통령의 인기와 연결하려 하며, 자문 과학자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진 화성인이 평화를 수호하는 종족일 것이므로 그들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에게 더 위험한 존재일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환영할 것을 권유한다. 대통령은 이들을 영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화성인들은 네바다 사막에 집결한 환영 인파를 무참하게 살육한다. 외계와의 만남은 우호적이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암시한다.

팀 버튼은 최근 SF의 일반적 경향에 대해 냉소적 철퇴를 가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스필버그를 비롯한 최근 한 세대의 경향은 인간의 피조물(인조인간, 로봇, 슈퍼컴퓨터 등)의 반란을 디스토피아적 암울한 시각으로 그리는 데는 너도나도 앞장섰지만, 외계인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의 소설을 각색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에서도 주인공은 고도 문명의 외계인들이 저급한 수준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한다.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인에 호의적일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논리에 기준해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만남의 실패 후, 대통령에게 공보비서는 국민 의견 수렴을 위한 공청회를 열 것을, 군 수뇌부는 핵무기를 동원한 대대적 보복 공격을, 자문 과학자는 문화적 차이일 수 있다며 대화 창구의 정립과 함께 평화적 해결을 제의한다. 공식 사과문이 오가고 화성인들은 국회의사당에 연설하러 오지만, 다시금 무자비한 살육전을 펼친다. 더 나아가 화성인들은 지구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지구인들은 속수무책이다. 외계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우리 마음대로가 아니고 그들 마음 대로인 것이다.

그들이 공격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지구를 구할 것인가? 어떤 권력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구를 구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에서 평소 소외된 사람들이다.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는 할머니가 매일 듣는 올드 팝송이 화성인들의 공격에 초토화된 지구에서 유일한 방어책이 된다. 화성인들은 이 노래만 들으면 모두 두뇌 파열로 죽는다.

버튼의 이 시니컬한 입장은 단순히 냉소적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다양성이다. 지구에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있고 이들이 마주치는 문제의 해결책도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외의 해결책은 타인의 이상함을 묵살하지 않고 다양성을 보존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결국 지구를 구한 것은 ‘괴짜 할머니’와 그를 도와주는 ‘괴짜 손자’이고, 화성인들에게 치명적인 무기는 핵무기도 첨단 무기도 아닌 ‘흘러간 옛노래’이다.

다양성에 대한 해학적(諧謔的) 접근, 어쩌면 이것이 팀 버튼 영화의 특성일지 모른다. 이런 접근을 위해서는 동화적 상상력과 함께 세상을 직시하는 현실 감각이 동반되어야 한다. 스필버그도 동화적 상상력에서 뛰어남을 보이지만, 그가 동화 세계 내부에 침잠하는 스타일이라면, 버튼은 동화 줄거리의 외연이 현실과 갖는 삼투압적 관계를 집어내 보고자 하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성 침공」은 뒤죽박죽 만든 영화일지는 모르지만, 안이하게 만든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안이한 할리우드 영화계에 ‘팀 버튼 침공’을 시도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한바탕 웃으라고 하지만, 입안에 남는 씁쓸함과 머리 속에 남는 의문부호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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