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내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쌓여 온 세상이 은세계로 뒤바뀐 그 날 세영의 집에 불쑥 찾아온 삼례는 어린 세영의 가슴에 미묘한 감정만 남긴 채 진보를 떠나고, 삼례처럼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소망을 간직했으나 가부장의 틀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살던 세영의 어머니 역시 남편이 돌아온 다음날 묘연히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가난했던 유년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이고 고향도 그러한 기억으로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장소라고 말하는 작가 역시 오래 전 고향을 떠났고 이제 그 시절의 궁핍함과 절박함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나는 고명한 사상도 없고 철저한 작가 의식도 없다. 단지 어렸을 때 가난을 경험했고, 그 가난이 지금의 나를 그리고 『홍어』를 존재하게 했다.”
 

 
 
설국의 세계가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말을 잊고 말았다. 태어나서 그토록 많은 눈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높낮이가 삽시간에 소멸되어 버린 은세계를 망연자실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은세계로 채색된 바깥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다시 중얼거렸다. “세상이 이럴 수도 있네.”
 
가을의 끝자락이어서 세영이 넋을 빼고 바라볼 정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나비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버스가 안동에 들어서자마자 소슬하게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이 곳 안동과 영양 그리고 청송 일대에서는 예전부터 석학과 걸출한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는 작가 김주영의 말처럼 안동에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이 있고, 그 옆 영양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 순수시인 오일도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영양의 아래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 일대가 바로 작가 김주영의 고향이자 소설 『홍어』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버스가 안동을 지나 진보를 향해 잘 포장된 가랫재를 거침없이 달리자 작가는 옛 이야기 하나를 끄집어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 고개는 자갈로 되어 있었다고. 꽁치를 한 가득 실은 트럭이 가파른 고개를 넘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면 꽁치를 줍기 위해 이십 리, 삼십 리 밖에서 사람들이 몰려 왔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꽁치를 한아름 씩 들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며 작가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세월에 변한 것이 어디 고갯길뿐이겠는가. 이 곳에 청송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교도소 직원들이 타지에서 이주해 왔고, 사람들이 모이자 자연스레 장사꾼도 몰려들었다. 작가는 인심 좋고 심성 곱던 사람들이 외지로 빠져나가고 타지 사람들이 들어온 이 곳은 더 이상 예전의 고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삼례가 읍내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삭여낼 수 없었으므로 결국은 삼례를 찾아 나서기로 작정하고 말았다. 그 날 오후부터 나는 읍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의 방천둑을 배회하였던 지난 여름의 그 사내처럼 위협적이면서도 배타적인 시선을 하고, 노랫소리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읍내의 크고 작은 선술집 주변을 몰래 엿보기 시작했다.
 
버스가 진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질녘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진보면에 장이 서는 날은 3일과 8일. 우리가 간 19일의 한산한 진보 장터는 서울의 동네 시장과 흡사했다. 이 장터에서 세영은 자전거포 사내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삼례를 그리워하며 얼마나 찾아 헤매었을까. 그러나 노래방, PC방, 단란주점이 들어선 그곳은 삼례를 찾던 세영의 모습과 작가의 유년시절 풍경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시장의 끝에 다다르자 진보초등학교가 나온다. 그 곳에서 발걸음을 멈춘 작가의 시선은 아카시아 나무에 고정된다. “이 곳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아카시아 나무 뿐”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오리라고 말하기도 하는 홍어였다. 하찮은 홍어포 한 마리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겐 내가 열 살 되던 해부터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로 상징될만한 건어물이었다. 아버지의 별명은 홍어였다. 때로는 가오리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 생김새가 갸름하기보다는 네모진 편인 아버지는 목덜미께에 백납까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언뜻 홍어의 살가죽을 떠올릴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인 것 같았다.
 
진보면에서 월정리로 향하는 2차선 위로 질주하는 차들이 과거와 현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면 길가로 끝없이 이어진 풍경이 옛 추억에 젖게 했다. 그 길을 따라 2km 쯤 더 들어가면 작가 김주영의 생가가 나온다. 그 집 역시 오래 전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되었고, 지금은 삼십여 년 전에 이사온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 점심밥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가난했던 그 시절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기가 다반사였고, 점심밥은 소풍이나 운동회 때만 먹는 것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로 작가는 가난한 유년시절은 보냈다. 그 시절 그는 외로움과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해 홀로 상상력을 키웠고, 그러한 상상력이 부엌 문설주에 매달린 홍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어린 세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처마가 쓰러져 내릴 만큼 허름한 집에서 기억조차 못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날카롭고 투명한 촉수를 지닌 작가 역시 그 곳에서 세영과 같은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니 생각으로 오금만 저리지 않았더라면…, 나도 삼례를 따라 떠나고 싶었데이. 몸은 개천에 빠져 있는데, 마음은 항상 구름과 같이 떠다녔제, 그래서 마음 속으로는 조선천지 안 가본 곳이 없다…. 중략 …나는 골목길로부터 우리집 뜰을 가로질러 툇마루 아래에서 멈춘 외줄기 고무신 발자국을 보았다. 그러나 들어왔던 발자국이 집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었다.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가장한 어머니의 신발자국은 두 번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결연한 의지를 아버지가 아닌 내게 은밀하게 귀뜸한 것이었다.
 
새벽 내 거위털 같은 함박눈이 쌓여 온 세상이 은세계로 뒤바뀐 그 날 세영의 집에 불쑥 찾아온 삼례는 어린 세영의 가슴에 미묘한 감정만 남긴 채 진보를 떠나고, 삼례처럼 훌훌 떠나버리고 싶은 소망을 간직했으나 가부장의 틀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살던 세영의 어머니 역시 남편이 돌아온 다음날 묘연히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가난했던 유년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이고 고향도 그러한 기억으로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장소라고 말하는 작가 역시 오래 전 고향을 떠났고 이제 그 시절의 궁핍함과 절박함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나는 고명한 사상도 없고 철저한 작가 의식도 없다. 단지 어렸을 때 가난을 경험했고, 그 가난이 지금의 나를 그리고 『홍어』를 존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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