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모양새가 사뭇 다른 두 여자는 어떤 악착스러움에 기반하여 인생을 꾸려 나가려 했다. 우선 뭐든지 열심히 해보고 난 다음에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일대의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두 여자는 그해 봄에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결혼한지 십년하고 이개월 지난 여자, 다양한 종류의 신용카드를 되도록 많이 소지하게끔 남편을 독려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에 시장에 들러 남편의 면바지와 아이들의 반팔 티셔츠를 사 오면서 이사 온지 삼개월 된 집을 높이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7층에 위치한 남편 명의의 아파트 베란다 창문이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곧 귀가하려고 하는 아파트 단지는 그 안에서 저마다 웅크리고 몸을 삭이는 사람들 덕에 편리한 이곳저곳이 이것저것의 간판을 덕지덕지 지고 있었다. 그중에 건물의 외벽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가계부의 가지런하고 잡스러운 칸들처럼 간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간판들을 일별했다. 좌우와 위아래로 정렬된 유정수퍼 영상비디오 다래정 온수탕 피아제피자, 하고 읽어 내려가다가 젬마, 라고 씌어진 간판에서 잠시 쉬었다. 저건 무슨 가게일까 궁금했지만 이내 다른 간판으로 관심을 돌렸다. 보람의 상실, 은 더 독특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정문에서 멀지 않은 이 상가 건물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커피숍 이름치고는 좀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스팔트의 작은 사각형을 밟는다. 그 부분은 얼마 전에 땜질되어 미리 깔린 아스팔트보다 색깔이 좀 더 까맸다. 또 한 여자가 반대쪽에서 걸어오면서 짙은 사각형을 밟는다. 지나치면서 두 여자의 쇼핑백이 서로의 오른쪽에서 살짝 스친다.
  보람의 상실은 촌스럽긴 하지만 다방 이름으로선 꽤나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고 생각하며, 이혼한 지 팔년이 된 여자, 일본 관광객에게 받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어떤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있었다. 오전에 비행기로 태워 보낸 일본인들은 관광 가이드의 손에 많은 걸 쥐어 주었다. 그녀는 일본 관광객들이 그녀에게 사적으로 돈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받은 선물들 중에 부피 나가는 물건은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녀는 현금과 작은 악세사리들만 챙겨서 차 없이 일찍 퇴근했다. 피곤한 날 운전대를 잡으면 사고를 내서라도 영면으로 들고 싶다는 충동에서 헤어 나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철없이 조는 바람에 집에서 다섯 코스나 더 먼 곳으로 떨구어졌으나 그녀는 오늘만은 걷기로 했다. 평소에 많이 걸어 다녀야 자동차를 탈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소싯적부터 버리지 않는 그녀였지만 아무래도 다섯 코스는 좀 먼 거리인 것 같았다. 남자들은 그녀를 바래다주고 자가용으로 한 시간이나 한 시간 삼십분을 되돌아가곤 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그 아무렇지도 않음의 뿌리에 자신의 숱한 발자국이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보, 이번에 효성에서 카드가 하나 새로 나왔어. 취학 아동을 키우는 여성을 위한 거라던데 그거 하나 만들면 교육비가 좀 절감될 것 같아.”
  “당신, 연회비는 걱정도 안 돼? 우리, 카드를 많이 만든 거 같아. 정작 사용하는 카드는 몇 장 없잖아.”
  “난 요모조모 따져서 여러 종류를 적재적소에 쓰고 있단 말이야. 당신이나 그렇지. 난 한달에 카드 회사에서 주는 할인 혜택 때문에 생활비를 얼마나 절약하는지 몰라. 연회비가 얼마나 된다고 그래? 이 카드도 그래. 아이들 상해 보험도 공짜로 가입할 수 있고, 가맹점에서 학용품이나 수업 준비물 구입하면 20프로나 할인해 준단 말이야. 얼마나 꼼꼼히 따져 봤는데. 하나 만들어 줄 거지?.”
 <알림 : 소설 상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은 작가의 의도입니다.>

 
 
남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많은 카드를 소지하고 있었다. 남편의 지갑엔 신용카드 세 장이 들어있는 반면에 아내의 장지갑엔 무려 20장이 넘는 카드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 말대로 카드를 솜씨 있게 잘 사용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아내가 사온 면바지는 싸구려티가 확 났다. 아무리 보아도 좋은 감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아니다. 더 주의깊게 찾아보면 날림으로 바느질 된 것도 눈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언젠가 성인 캐주얼이 5프로나 할인되는 카드가 있다면서 하도 수선을 떨어서 카드를 만들어준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말이다. 그 카드만 있으면 근처 가신 백화점에서 그렇게 할인된 가격에 옷을 살 수 있으며 백화점 카드까지 만들면 중복 할인이 가능하다고 열을 올리기에 한꺼번에 두장의 카드를 뚝딱 만들게 되었다. 가신 백화점 카드와 성진 어패럴 신용카드였다. 그런데 아내는 할인되는 품목을 산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많은 카드의 할인 종목이나 무이자 종목을 다 기억하고나 있는 것일까. 남편은 궁금했지만 카드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엄마, 아빠 오면 피자 사준다고 했잖아.”
 

 둘째가 아빠 들으라는 듯이 칭얼댔다. 그러자 아내는 아이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엉, 아빠보고 사달라고 해.”
 

 남편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배달 시켜도 되었건만 아내가 왜 한달에 한 번 공짜로 패밀리 사이즈의 피자를 먹을 수 있는 혜택이 있는 카드를 건네주지 않는지 궁금해 할 시간을 벌고 싶었다. 아내는 분명히 아이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풍성하게 먹이고 싶다면서 미식가들을 위한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잠시 졸랐었다. 남편은 그의 이름을 기꺼이 빌려 주었지만 아내는 그녀가 소지한 카드를 빌려주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내에게 수집욕이 좀 있는 건 알지만 신용카드를 모으는 일은 좀 유난한 취미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그의 양 손에 바지런히 걸려 있는 아이들의 두 손을 꼬옥 쥐어보았다. 큰놈은 작은놈의 용돈까지 자기 돈으로 만드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지만 작은놈은 큰놈 소유로 돌아가 버리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더 비상한 능력이 있었다. 한 번은 제대로 야단을 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큰놈이 사악한 맘을 품은 것 같지 않아서 아직은 영리한 아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아무래도 용돈이 좀 적은 탓이리라. 아내는 아이들의 용돈 주는 일만큼은 그에게 일임시키고 있었는데 회사 공돈을 자신의 용돈으로 대는 남편은 아이들의 용돈까지 대기가 빠듯한 지경이었다. 오늘 피자도 아이들을 식욕을 충족시켜야 하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피자값은 아이들 용돈에 해당했다. 따라서 그 돈은 고스란히 남편 호주머니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믿는다. 아내의 꼼꼼한 재산 관리 덕에 5년 만에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파트 평수를 늘려서 이사도 했다. 아내가 시어머니에게 조금만 살갑게 대했으면 좋겠는데 살림을 키우는 재주에 눌려 좀 닭살스럽더라도 어른들을 따뜻하게 모시는 재주는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보람의 상실,을 스쳐지나가면서 그는 아직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때부터 비로소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도 봄이었을 때 그는 바이어들을 접대하는 일로 어지간히 바빴다. 밤늦게 술에 적당히 취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날이 잦았다. 그는 승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부여되는 첫 임무들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월급도 어느 정도 올랐으므로 늦은 귀가가 아내에게 그렇게 미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요즘 들어 바빠진 남편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왜 이렇게 매일 늦어? 여자 생긴 거 아니야? 여자랑 있다가 왔지?”

  남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들이 아직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남편에게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얼굴에 눈만 붙은 괴물처럼 아무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체였다. 하지만 귀는 선택의 여지없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피로가 어린 눈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이런 소리를 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아내의 너무나 뜬금없는 반응에 남편은 온몸에 피로가 덧입혀지는 무력함으로 그냥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고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정말 무슨 소리야? 그는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정말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남편은 보통 때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귀가했다. 그러나 승진하기 전보다는 한 시간이나 늦은 시간대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늦은 게 아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내의 목소리가 거칠게 그의 몸을 떠밀었다.

  “어떤 여자랑 있었어?”

  남편은 아랫도리에서부터 불끈 화가 솟았다. 아이들은 주방에서 저희들끼리 핫도그를 전자렌지도 아닌 가스렌지에서 중탕으로 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엔 승진하기 전보다 두 시간 정도 늦었다.

  “그 여자가 당신한테 이혼하라고 그러지?”
 

 그 다음날엔 이 날보다 되려 세 시간이나 일찍 들어왔다.
 

 “이혼하면 아이들은 당신이 데려가.”

  카드 이야기는 없어졌지만 여자 혹은 이혼이라는 말이 승진 이후에 줄곧 돌았다. 남편보다 아내의 입이 더 바빴다. 나중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소용없었다. 일찍 온 날은 일찍 온 날대로 괴롭혔다.
 
“그 여자가 얼른 나오라고 그러지? 나도 구경시켜 주지 그래?”

  남편은 아내에게 미쳤는지 가끔 물어 보았지만 아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덜컥 겁이 났고 승진한 후 두 번째로 받은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지 않았다.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담판이 진행되었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남편은 놀란 나머지 수락했다. 남편은 아내의 시누이를 찾아가서 술을 마셨다. 시누이 노릇을 톡톡히 하던 누나였다. 아내를 욕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누나를 멀리해 왔었는데 이혼을 결정하고 보니까 누나가 하던 말이 환청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년이 엄마한테 어머님, 하는 소리를 한 번이라도 한 줄 알아? 똥통에 들어가도 그런 표정은 안 지을 거야. 엄마 쳐다보는 인상이 세상에나 똥 쳐다보는 것보다 더 하잖아.”

  그의 누나는 십년 동안 무수히 울었다. 그년이 엄마한테 무심하다고 울고 그년이 시댁식구들한테 야박하다고 울고 그년이 시댁에 와서 손이 물 한 방울 안 묻힌다고 울었다. 시누이란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는 씁쓸함에 못내 괴로웠던 그였지만 실은 그의 귀로 전해지는 아내의 모습은 거의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실감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러나 아내가 거의 두 달 만에 이혼 성사 직전까지 상황을 몰고 간 것에 탄복하여 드디어 눈물까지 떨구게 되었다. 결국 그는 아내와 헤어졌는데 더욱 놀랄만한 일은 시댁에서 그 이혼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의 노모마저 이혼하기를 바랐던 모양으로 이혼 사실을 통보받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던 새 아파트에 살아본지 몇 달 만에 전세를 내고 여자와 아이들에게 작은 전세 아파트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하숙방으로 짐을 옮겼다. 여자는 생활비를 요구했는데 그는 그의 월급에서 100만원을 매달 떼어주기로 했다. 그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찾아가서 야외로 데리고 나왔다. 두 달 동안 주말마다 여러 명소를 찾아다녔다. 그는 아이들이 소풍가는 기분으로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어느 토요일인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던 탓에 그는 일요일에 아이들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늦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은 못 갈 것 같으니까 아이들한테 그렇게 좀 전해줘. 다음 주엔 놀이동산에 데려간다고 말야.”

아이들이 징징거리는 소리가 전화선 너머에서 들렸으므로 그는 아이들의 안부를 재차 물었다.
 
 “내일은 못 간다고 전해줘. 다음 주에 놀이동산에 같이 갈 거야. 우는 놈이 누구야? 작은놈이지? 큰놈 좀 바꿔 봐.”

  “그 여자가 내일은 같이 있어달라고 한 모양이지? 아이들이 당신 만나고 오는 날엔 그 여자 이야기만 하길래 내가 오늘 때렸어. 내일 와서 아이들 데려가.”

남자는 불끈, 화가 일어나서 전화기를 놓아 버렸다. 치밀어 오르는 것은 술로 가라앉히리라 다짐하고 오랜만에 주말에 술을 마셨다.

  남자는 일요일 밤늦게 핸드폰 울리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있었다. 술이 깨지 않아 하루 종일 하숙집에서 뒹굴다가 겨우 속을 진정시키고 잠들었던 참에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살의를 도모했다. 그러나 엉금엉금 기어가서 굳이 전화기를 집어 들고 여보세요, 라는 단어를 내뱉은 이유는 아이들이 아빠에게 다음주를 약속하는 전화이겠거니 했기 때문이다.

  “아빠!”

탄성처럼 내뱉는 말에 남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술이 아직 깨지 않았나 의심될 정도였다.

  “아빠, 여기 할머니 집이야. 할머니가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했어.”

  남자는 순간 무엇부터 물어 보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할머니 바꿔 봐. 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게 노모의 목소리가 전화선으로 잦아들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시골로 차를 몰았다. 시속 바늘이 빨간 수치로 빗금 쳐질 때마다 그는 세상을 모조리 빨아들이기도 할 모양으로 크게 숨을 마시고 몸속의 내장이 튀어 나오고 피가 솟구칠 것처럼 크게 내쉬었다. 아이들은 이삿짐을 나르는 화물트럭에 실려 오밤중에 시골로 떠다 넘겨졌다. 화물트럭에는 인부 둘과 아이들 둘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 모든 걸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광분하지 않기로 거듭 다짐했다.

  시골집 마당에는 온갖 가구들이 눈치없게 서 있었다. 책상, 컴퓨터, 책. 모두 아이들 것이었다. 화분과 밥그릇까지 아이들 것만 있었다. 그는 새벽까지 노모와 그 짐을 집안으로 날랐다. 그 다음날 그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고 다음 날에는 아이들이 쫓겨 난 집 앞에서 잠복을 시작했다. 그가 하루에 20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잠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게 이런 것이었다. 여자는 그와의 이혼 후에 다시 혼인 신고를 해놓았다. 그 다음 그의 명의로 된 아파트를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의 명의로 된 신용카드로 수천만 원의 현금 서비스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전세금을 돌려받고 아이들만 이삿짐 센터에 맡겨버린 채 사라진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1차 이사를 단행한 후에 엄마가 없는 집에서 2차로 이삿짐을 날라줄 인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따려온 짐 중에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거대한 꾸러미 몇 개가 쓰레기를 정성스레 싸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직후 그에 대한 그녀의 모든 짓거리를 확인하느라 동분서주 했고 드디어 본능적으로 잠복에 나선 것이었다. 그의 잠복은 5일이나 지속되었다.


  이혼한 지 오년하고 오개월이 지난 여자, 사업체로 일본어 특강을 나가는 날이었다. 한 달 전에 밤이 이슥해서야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이삿짐을 옮기는 광경을 반대편 도로 너머로 목격했다. 그녀 옆에서 운전을 하던 남자는 밤에 하는 일과 낮에 하는 일이 잘 구분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고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어울릴 법한 작업은 이삿짐 나르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거나 섹스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여자는 자정 가까이 이사를 하는 것에 분명히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망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저렇게 서둘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특강은 대게 이른 아침에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다. 여자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화장을 진하게 했다. 아니,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했다. 회사에 특강을 나가면 어느 회사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그녀의 수업을 더 많이 듣는다. 그녀가 오늘부터 수업할 장소는 수형기술산업이라는 회사의 소강당이었다. 아마도 남자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화장대에서 오래 머물렀다. 한 달 전에 운전을 해 주던 남자와 깨어진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언가를 결심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2년 동안 일본어 공부 이외의 모든 것을 등한시했다. 덕분에 유학 후 곧바로 취직한 여행사에서 승진도 빨랐고 이렇게 외부강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수형기술산업의 남자들은 수더분하게 생겨 먹었다고 생각했다. 간부급인 듯 보이는 어떤 남자는 수업 중에 수시로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돌연 고개를 돌리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하루, 강의가 끝나도 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그 사내에게 저녁 약속을 제안했다. 그녀는 그의 수심을 풀어 주리라 다짐했고 그녀의 적극성에 남자도 맘을 털어 놓았다. 그에 관한 대부분의 것들을 알게 되었을 무렵, 그녀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 후 아이를 연거푸 두 번이나 뱃속에서 유산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아이를 잃었다는 생각 그 자체만으로 괴로웠음을 물론이거니와 유산의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떠났었다. 남편은 이혼을 제안했고 그녀는 가진 것 없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일본어를 마스터했다. 귀국 후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의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남자와 그의 아이들과 더불어 주말을 즐기면서 그녀는 더 이상 밤늦게 운전해 줄 남자를 갈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매주말마다 아이들과 어울렸는데 한 번은 시골로 이사를 하느라 놀아주지 못했다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되풀이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한밤중에 이삿짐을 나르느라 끙끙대던 그 독특한 풍경을 슬그머니 재생시켜 보는 것이었다. 그의 경우처럼 그때 그녀가 보았던 이삿짐들에도 반드시 사연이 있을 거라고 거듭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시골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할 무렵에 여자를 데려 왔는데 아이들은 여자를 이모라고 부르면서 그녀를 따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이 엄마를 찾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그날부로 그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선 적금을 깨고 급한 돈부터 막았다. 급전을 위해 그의 차를 팔면서 그녀는 자신의 차를 그가 쓰도록 배려했다. 그의 전 부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기라도 하면 오독오독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키웠다. 그녀는 또한 새로운 열정을 만났다. 가끔 남편의 노모를 찾아뵈면서 용돈을 드렸고 남자의 조카들에게 온갖 선심을 쏟았다. 대학 때문에 외지로 나가 생활하는 조카들에겐 그들이 필요한 전자제품을 아깝지 않게 사주었고 힘이 부칠 땐 그녀가 쓰던 가구들을 택배로 부쳤다. 그의 아직 어린 조카들에겐 옷을 사 입혔고 시골에 자주 놀러오라고 용돈을 주었다. 한 번씩 할머니댁에 다녀가는 조카들에겐 더 많은 돈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받은 수고비를 아낌없이 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녀의 벨소리는 독촉과 협박을 위한 전화 때문에 울렸으며 그녀는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았다. 남자의 노모와 형제들은 이혼경력이 전무한 그들 가문의 전통을 두고도 남자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탓에 그녀는 더욱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남자의 전 부인은 마이너스 점수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평균만 해도 높은 점수를 딸 것이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무렵 남자의 아이들은 그녀를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불렀고 그녀도 엄마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녀의 집으로 이사 온지 오래였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시어머니 집에서 시골학교에 다녔으므로 그녀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찾아가서 아이들의 공부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녀만 오면 놀러가자고 난리였지만 그녀는 선물을 잔뜩 준비해 가서 아이들을 달래곤 했다. 시어머니는 결혼하기 전에 죽은 그녀의 엄마와 닮은 데가 있어 또한 극진히 모셨다. 

  언젠가 한 번은 아이들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순간, 떨어진 것이 뱃속의 아이가 아닐까 무섭도록 걱정이 된 그녀는 남편을 소리쳐 불러서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무사했다. 남편은 그녀가 떨어뜨린 것이 아이가 아니라 콩나물 바구니였다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기쁨으로 다시금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들이 과거의 엄마와 접촉하는 일은 남편이 과거의 아내와 만나는 일보다 더 불경스럽게 여겨오던 차에 그녀는 자신이 남편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이렇게 확인 받은 것 같아서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기고 더욱 세차게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세 아이를 다 잘 키울 수 있다고 아직 못다 흘린 눈물에게 일렀다. 무엇보다 행정상 그의 두 번째 이혼을 어서 마무리 짓고 싶었다. 

  임신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산모다운 휴식을 보장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즈음에 치매기가 있던, 남편의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시어머니의 시어머니가 되시는 분이었기에 세상을 뜰 때는 아흔 살이 훨씬 넘은 연세였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치매를 약하게 앓았기 때문에 모든 가족들은 집안의 대모가 곧 세상을 등질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남편은 할머니의 죽음을 전 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장례식엔 참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 절차를 밟지 않았으므로 할머니 영을 송별하기에 조금 죄송하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의 전 부인이 할머니의 죽음을 모른다는 사실을 너무 반긴 나머지 남편의 요구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 죽음 이후, 그녀의 시댁에서는 죽음과 가까운 일들이 하나 더 일어났다. 남편의 남동생이 차사고로 삼일이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음주운전으로 전봇대를 들이받고 경찰서에서 조서까지 다 작성한 사람이 병원에서 의식을 잃었다. 외상은 심각하지 않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입원해 있던 중에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정신을 놓았던 것이다. 내장이 다 터졌다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한 달 간이나 중환자실에 있었다. 배 안에서 배 밖으로 연결된 호수를 통해 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녀는 시누이와 동서의 간병 중에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집에서 두 시간이나 떨어진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 사람이 잘못 들어와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말이 행여나 돌까봐 시누이나 동서한테 더욱 극진했다. 

  그녀는 액땜하는 셈 치고 시동생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녀가 대모을 통해 경험한 한 번의 죽음과 죽음에 이를 뻔한 도련님의 또 한 번의 사고는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징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산달이 가까워왔지만 남편은 그 일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시누이와 간간히 통화를 했으나 식당으로 품팔이를 나가는 시누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실로 없었다. 여자는 만삭이 된 배를 안고도 잘도 돌아다녔다. 시어머니의 생일을 챙기고 조카들의 생일을 챙기면서 이제는 시아버지의 제사에까지 얼굴을 들이밀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시댁의 관심은 이에 미치지 못해서 그녀는 가끔 바늘에 찔린 듯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워낙에 드물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남편에게 이런 소리를 자주 했었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시어머니 앞에서도 곧잘 이런 소리가 튀어 나왔는데 그녀는 시댁의 무관심을 남편에게 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카들이 돈 맛을 알았는지 급전이 필요할 때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오면 그녀는 순순히 돈을 부쳐주고는 남편에게 그러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하는 거야?”
 

 남편은 아무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실컷 떠들고 나면 자상하게 다독거려 주었지만 언제부턴가 어린 조카들이 그녀에게 숙모나 외숙모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다다다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누나, 바닥에 머리카락 떨어지면 안 돼.”
  “이게 누구 머리카락인 줄 알고 그래?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아.”
  “안 된다니까. ‘다다다다’가 발견할 거야.”
  “참, 그러면 또 다다다다거리겠지?”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슬쩍 전해주었더니 자기 집안이 워낙에 과묵해서 말이 많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교의 한 방법으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살살 녹는 말을 많이 해 왔지만 자신이 다변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애교 떠는 말이랑 ‘다다다다’하고는 좀 다르지 않느냐고 했더니 남편은 그녀가 가족 중에서 유난히 발음도 좋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일본어를 배우면서 그녀의 말투가 좀 바뀌긴 했다. 그러나 가끔 집 안 구석구석을 광분하듯 청소해대는 자신을 나무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기실 그녀는 청소하는 일에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과거의 며느리보다 유별나게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른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성급하게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그녀는 더 늦기 전에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니던 여행사도 그만둘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이혼남과 이혼녀가 붙어산다고 말이 많았던 동료들이었다. 그녀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시댁 식구뿐이었다. 그녀가 이혼녀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모르는 시댁 식구와의 관계는 멀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뱃속의 아이는 보채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더 지나고 나서 그녀는 병원을 찾았다. 그제서야 통증이 오는 듯 마는 듯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남편은 그때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꿈에서 전기에 감전되듯이 떨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깼다. 진동 모드의 핸드폰을 받았을 때 다다다다 하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 한참을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었다. 남편은 아기, 라는 단어만 알아듣고 어서 가겠다고 말했다.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면서 부재중 전화가 20통이 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에게 있어 진동 모드의 핸드폰은 신용카드만큼이나 불길한 것이었다. 

  여자에게 가는 길은 그가 다시 잠들고 싶을 만큼 지루했다. 네 시간 만에 도착한 그는 여자가 세 시간 동안 비명 속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문득 허리깨에서 어깨쪽으로 한기처럼 밀려오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는 다짜고짜 둘 중 하나만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의 맘은 이미 비극에 절어 있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살기 바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 행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병원 복도에 도열된 의자 중 하나를 눈치없이 차지하고 긴 잠을 잤다. 최근에 바뀐 그의 핸드폰 번호는 여자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전화 올 데도 없었다. 그는 그 사실에 이상한 평온함을 느끼면서 조금 전의 으스스한 기분을 등짝에 눌러 깔고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대하소설처럼 파란만장한 꿈을 꾸었다. 

  그는 늘 누군가의 보호자였다. 자처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위자 장남이 되어버렸고 결혼을 하자 가장이 되어버렸다. 보호자, 보호자, 하는 소리가 단단한 벽돌이 되어 그의 심장을 진지하게 누르고 있었다. 보호자, 보호자 하면서 낱개로 떨어지는 벽돌은 그의 얼굴을 누르고 손과 발을 누르는 것이었다. 보호자, 보호자 할수록 그는 벽 뒤에 미장된 검은 고양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는 수직으로 그는 수평으로 가두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 보호자 ?  씨 보호자  분, 계십니까?   씨 보호자 되시는 분, 계십니까?”

  그는 시멘트로 덧 씌어진 눈을 뜨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사지를 힘차게 뒤틀자 잘 발려져있던 벽돌이 우선 나가떨어지고 이윽고 그도 의자에서 떨어졌다. 
 

 “예, 접니다.”
 

 그는 배우지도 않은 복화술을 썼다. 
 

 “예, 접니다.”
 

 간호사는 그의 말보다 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왔다. 
 

 “부인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는 누가 살아 있을까 짧은 시간 격렬하게 사고했다. 
 

 “부인에게 좋지 않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
  “누가 죽었죠?”
 

 간호사는 남자의 물음에 말하기 곤란했던 사실을 다소 수월하게 말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는 표정으로 풍만해서 그에게 수박씨 내뱉듯이 한 단어를 던졌다. 그러나 간호사는 예전에 수박씨 멀리 뱉기 시합에서 줄곧 일등을 했던 유년의 추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하여, 그는 남의 입 안에서 튀어나오는 침에 절은 수박씨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찜찜한 단어를 들었다. 아기. 혹은 아이. 정확한 발음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단어가 여자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이인지 아기인지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이유 따위는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다. 여자는 열 시간 이상 진통으로 힘들어했고 또 노여워했다. 산모의 나이 많음을 문제로 들어 제왕절개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뱃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시달린 태아는 뱃속에서 죽어버렸다. 태어나지도 않은 채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적용시키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면서 여자를 위로했지만 남자는 속으로 여자를 탓하는 마음이 컸다. 여자는 또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온몸의 뼈가 깎여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 오히려 뼛속 깊이 감추어진 자신의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시댁에서 겉도는 듯한 자신에게 출산의 고통을 당당히 감내하였기에 떳떳한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뼛속 깊이 다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좀 스탠다드한 인생을 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자조하면서 시어머니를 비롯해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시어머니의 모든 언니 동생들, 모든 오빠 동생들의 아내들, 시어머니의 자식들인 시누이들, 시누이들의 남매인 도련님의 아내, 심지어 남편의 전 부인까지 모조리 자연 분만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는 척 하지 않으려 했다. 시댁에서의 스탠다드를 존중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그녀 또한 그 가문에서 존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녀는 뼛속의 다짐들이 분만의 고통과 함께 다 으스러지고 난 후에야 자연 분만의 결심을 포기했지만 그 땐 이미 늦어버렸다. 그녀와 함께 수술실에 있던 사람들의 마스크는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가리는 마스크의 역할을 충분히 했으며 그녀는 그 마스크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았으면 했다. 아이가 뱃속에서 숨쉬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의 숨쉬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생을 통 털어서 그토록 숨쉬기가 어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터진 살갗 틈으로 저미는 고통을 눈으로 가져와 소금기가 농후한 울음을 울었다. 그녀의 눈은 오랫동안 벌겋게 익어 있었다. 이후 그녀는 날마다 피곤하여 더 이상 차를 몰 수 없게 되었다.
 
  일부러 다섯 정거장이나 더 지나쳐 내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예전에 살던 멋진 아파트가 그녀의 집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들은 바 있었다. 봄 햇살은 사람에게보다 아파트 건물 벽에 붙은 유리창에 더 따갑게 쪼이는 것 같았다. 유리창은 그녀가 시선의 각도를 조금씩 바꿀 때마다 햇빛에 유난히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녀는 그래도 아직 봄인데 하면서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조금씩 비껴갔다. 저 창문들 중 하나는 남편의 보금자리였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 반짝이다 못해 발광하는 유리창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래로 눈길을 떨구자 방석 모양의 아스팔트가 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새로 땜질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런 작업은 이미 오래 전에 마무리 되었다는 듯 뭇 아스팔트의 색깔을 따라가기 바쁜 기색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의 성과인지 예전엔 제법 분명했을 법한 검은 색은 다른 아스팔트와 더불어 더렵혀져지고 색이 바래 있었다. 그 사각형을 밟으면서 그녀는 예전에도 다섯 정거장 후에 여기 내렸던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보람의상실이라는 간판이 낯설어서 여기가 아닌가 보다 하고 갸우뚱했다. 간판이 교체되는 중이었는데 헌 간판은 왠일인지 반토막이 나 있었다. 보람, 의상실. 이윽고 새로운 간판이 올라갔다. 보람 의상실. 똑같은 간판을 왜 내리고 올리는지 알 수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상가 건물을 등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걸음이 좀 빨라졌고 따라서 간판을 새로 다는 인부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남발하던 주인이 조용한 틈을 타서

  “코피 찾아 들어오는 손님이 도대체 왜 그리 많담? 요즘은 실하고 바늘밖에 없는 의상실에서 코피까지 주는 서비스를 한단 말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일년 전쯤에 잠적한 한 여자의 얼굴을 상상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도대체 그 많은 돈을 들고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 많은 돈을 뭐하는데 쓰고 있을까. 

 <알림 : 소설 상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은 작가의 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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