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달 16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해외민주인사 초청한마당’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초청했다. 이에 송 교수는 초청에 응하고 35년만의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친북인사’로 분류돼 있는 송 교수의 입국은 공안당국에 의해 또 다시 불허됐다.이에 본지는 프랑스에서 20여 년 간 망명 생활을 한 홍세화 씨를 지난 달 1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직접 만나, 또 송 교수를 지난 달 26일 국제전화를 통해 우리사회 친북인사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물어봤다. 기사 내용은 두 사람의 인터뷰를 가상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이번 송두율 교수님 사건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죠.

홍세화 송두율 교수님 입국 불허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는 남북관계 진전의 이익은 일부 기득권 세력의 몫이었다는 것이고 둘 째는 역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극우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송 교수님 입국 불허 사건은 이 두 가지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송두율 사실 저 한사람이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고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용인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한 치의 인간적, 정치적 미덕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죠. 이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친북인사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송두율 분단 이후에 첨예한 체제경쟁, 이념경쟁 속에서 우리편 아니면 적(敵) 이라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습니다. 지금은 별로 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정적을 무조건 친북 인사라고 몰아세웠죠. 지금의 친북인사 개념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홍세화 친북(親北)인사와 종북(從北)인사의 구분도 필요합니다. 친북인사라는 말 자체는 ‘북한을 알고 북한과 가깝고 친하다 혹은 북한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친북 인사라는 단어에는 종북인사의 개념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홍세화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은 곧 반북이죠. 부정형을 이용하여 적(북한)이 있어야 우리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무서운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수구 기득권 층이 한국 사회 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하여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친북인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송두율 냉전 체제가 해체됐지만 세상이 바뀐다고 머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나를 인터뷰 한, 某 신문사 기자에게 협박성 메일이 종종 날아든다고 합니다. 북한에 대한 동물적 적대 반응이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증거죠. 게다가 수구 보수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있는 우리 사회 구조와 더불어 친북인사를 통해 먹고사는 공안당국과 언론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친북인사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 사회에서도 사상(이데올로기) 문제가 하나의 사회적 규제로 남아있습니까?

홍세화 프랑스는 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의 ‘Public’은 공개념이죠. 즉 공화국이란, 공익을 추구하는 근대 국가란 의미입니다. 봉건과 신분질서가 해체되면서 자유, 평등 이념을 앞세워 탄생한 것이 바로 근대 공화국입니다. 공화국에서는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하죠. 이것이 공화국 이념의 핵심인데, 공화국인 프랑스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사상의 제한이 공익의 추구라는 사회 정의에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Republic이란 단어를 엄연히 영문 국호에 사용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보라는 질서가 사회 정의에 우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명제는 존재하지만 그 역은 성립돼지 않는데 한국의 모습은 공화국 대명제의 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송두율 서독의 경우 1968년 좌익 학생운동이 크게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이 때 독일의 지배세력은 매우 불안해했죠. 이 때 좌익 세력은 공무원이 될 수 없게 했으며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취업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홍역을 겪고 나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면서 지금의 독일 사회는 안정됐습니다. 요즘 독일 사회에서 사상적 규제란 존재하지 않죠.

이번 송두율 교수 입국 거부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진보와 보수 중 어디에 더 가깝다고 보십니까?

홍세화 일단 진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보수라고 볼 수도 없죠. 보수란 말 그대로 어떠한 가치를 간직한 집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이죠. 이런 집단은 보수가 아니라 극우, 수구주의자 집단일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로는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이 있었죠. 그러나 지금의 극우, 수구 세력은 김구 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의 정신 중 아무것도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수구 기득권 층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럴 생각조차 없는 집단이죠. 한국 사회에 보수란 없습니다.

송두율 저도 진보에 가깝지는 않지만 보수라고 볼 수 없다고 봅니다. 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반동이죠. 예전에 양반은 진정한 보수라고 볼 수 있죠. 케케묵어도 자신의 원칙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고상한 보수주의자가 없고 반동만 존재합니다. 반동은 원칙이 없으며 자기성실성 또한 존재하지 않죠. 

 
 


 

 "레드컴플렉스 한 치의 인간미 없어

   세상이 바뀌어도 머리는 그대로

한국의 보수는 보수 아니라 반동

통일 추구는 한국 사회 특수한 진보

지식인의 최고 덕목은 계몽

관성에 매인 행동 양식 문제"


 
 
 
 

 

 

 

  
 
 

"친북인사와 종북인사 구분 필요

프랑스 등 공화국, 사회정의 우선

한국 사회 안보가 사회정의에 우선

우리 사회 진정한 의미 보수없어

한국 시밍들의 세외 심각한 수준

남한과 북한 근접 후 통일해야"


 
 
 
 

 

 

한국 사회에서 사상적 자유는 요원하다고 보십니까?

송두율 구라파에서의 진보 세력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좌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좌익이라 하면 매장 당하죠. 진보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희망을 갖고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특이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우리만의 진보가 있습니다. 저는 이 분단을 극복하는 것, 분단이 가져오는 비인간적 병폐를 치료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진보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정말로’ 분단 현실을 극복할 의지가 있다면 사상적 자유는 필수적입니다만 아직 반동세력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사상적 자유는 요원해 보입니다.

홍세화 다시 공화국 얘기를 해보죠. 공화국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고 용인하며 ‘공화국 공익 추구’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활동합니다. 그들에게 서로는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수구 세력에게 진보는 극복의 대상입니다. 진보 세력의 입지가 그만큼 적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진보세력 역시 지금까지의 습성에 의해 입장이 다른 상대를 부정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진보 세력 내부에서도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죠. 이는 우리 진보세력의 역사가 짧아 그 폭이 굉장히 넓은데 기인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권 내부에서 극우, 수구세력이 약간 흔들렸죠. 이는 우리 사회가 사상적 자유로 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것은 극우, 수구세력이죠.

송두율 교수는 최근 낸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의 처지를 드레퓌스와 비교하며 에밀 졸라를 언급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 에밀 졸라는 과연 있습니까?

송두율 이미 효율성, 능률성, 신속성이 지식인의 주요 덕목이 된 지 오래됐습니다. 더 이상 지식인들은 골치아픈 책을 읽지 않죠. 그러나 칸트가 말했듯 지식인의 중요 덕목은 바로 계몽입니다. 인간이 무지몽매해 생기는 것이 바로 계몽이란 과제이며 지식인이 계몽을 덕목으로 삼기 위해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에밀 졸라는 그러한 계몽을 몸으로 실천했으나 한국 사회의 지식인 중에는 그러한 용기를 가진 지식인이 드물죠. 돈이 안 되는 것은 아무 값어치가 없는 사회 분위기를 지식인 사회에서도 그대로 닮고 있습니다. 민족 성원들이 가져야 할 용기, 덕목, 지혜를 지식인들이 심어주지 못하고 있죠.
홍세화 지식인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제 생각과 송두율 교수님의 생각이 다소 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한국 사회 지식인 전반에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지식인들은 지식이 상품화 돼 있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지식인들의 가장 큰 역할은 계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식인들에게 교육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인 것이죠.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교육은 비판적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체제 순응의 교육입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뤄지는 잘못된 의식화가 우선적으로 바로 잡혀야 합니다. 자꾸 공화국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 같은데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제 딸은 고등학교 때 자신이 ‘사민주의자’라고 밝혔습니다. 이 정도로 공화국의 교육은 철저히 피교육자들의 사회 의식을 높이는 것이 중심이 돼 이뤄지고 있죠.

이런 우리 교육의 현실에 지식인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언론의 붉은 페인트 끼얹기는 왜 아직도 실효성이 있습니까?


홍세화
시민들의 사회 의식 형성은 교육과 언론이 크게 좌우합니다. 언론이 이러한 역할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이죠.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는 아직도 극우, 수구세력이 잡고 있습니다. 교육과 언론에 의해 시민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수구 세력에 맞장구치는 언론의 붉은 페인트 끼얹기가 먹혀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송두율 전 언론 개혁이 성공하면 우리 사회의 계몽의 70∼80%가 성공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언론이 자신의 잘못을 의식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길을 앞서서 오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계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사회의 공기를 공식적으로 대변하지 못하고 부분에 대한 이해 관계를 호도, 오도하는 것이 현재 한국 언론의 문제점입니다.

△한국 사회의 잊혀짐, 과거에 대한 무감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두율 교수나 친북인사는 어쩌면 과거의 사람이 돼버렸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십니까?

홍세화 그것은 우리 한국사회의 역사관 문제보다 사람들의 세뇌 문제이다. 한국 사회의 안보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안보이죠. 그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과 언론들은 사람들의 사회 의식을 모조리 사회 체제에 순응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안보질서는 사회정의를 압사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뇌 받은 사람들은 기득권의 안보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들(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사람, 민주화 운동가, 친북인사)에게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며, 그들을 잊는 것은 당연합니다.

송두율 사회 분위기도 문제입니다. 사회 분위기가 빨리빨리를 중시하고 속도를 숭배하다보니 생각할 기회가 없습니다. ‘epoche’란 단어가 있습니다. ‘stop’의 의미를 가진 희랍어가 그 어원인데 ‘전기’, ‘전환기’의 뜻이죠. 우리 사회엔 그러한 epoche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갈림길에 서면 일단 서서 어느 길을 택할까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관성에 의해 계속 뛰어갑니다. 이러한 습성이 우리 사회의 냄비 근성과 잊고 싶은 과거의 망각 등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홍세화
저는 북한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분단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약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앞으로 21세기를 겪으면서 남한과 북한은 같이 변화하고 통일을 모색해야 합니다. 물질 만능주의의 남한과 병영국가인 북한이 서로 변화한 후에 근접하게 되면 이는 가능하죠. 그러나 북한이 남한 수준의 천박한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의 천박한 물질만능주의만큼 북한이 변화하리라고는 보지는 않지만 서로 근접한다는 것은 결코 한 쪽의 흡수통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송두율 중국 古書 『장자』에 보면 장자와 혜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장자와 혜자가 길을 걷다가 연못의 물고기를 보고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 거야.” 이에 혜자가 답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줄거운 것을 아는가?”라고 말했죠. 장자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즉 내가 네가 돼보지 않고서는 너를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그동안 주장한 바는 바로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입니다. 밖에서는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북한의 고민이 있습니다. 북한을 무엇으로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의 내재적 고민을 듣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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