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역사 주장의 간극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 2001년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의 왜곡 파문이 일자, 역사 쟁점에 관한 이견을 좁히기 위해 2002년 한 · 일 역사공동위원회를 조직했다. 고대사 3개, 중세사 3개, 근현대사 13개, 총 19개의 주제에 대한 양국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지난 6월 발표됐다.


한 · 일 양국이 공동으로 연구한 역사 문제들 중 △광개토왕릉비문의 왜군문제 △임진왜란에 대한 한 · 일의 역사인식 △한 ·일간의 조약문제를 꼽아 살펴봤다. 

-왜군의 성격에 대한 논의-

먼저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이 논의의 대상이 됐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새겨진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 구문이 시각에 따라 임나일본부의 주둔군으로 해석돼,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왜군이 독자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왕래하면서 백제나 신라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미치던 점령군이라는 주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은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왜군’을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으로 파악한다. 일본은 일본 단독군이라고 말하거나, 연합군이라도 왜의 영향력이 백제, 가야에 비해 더욱 컸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왜의 단독 군대가 가야와 백제를 거쳐 황해도의 옛 지방인 대방까지 올라갔다면 이것은 가야나 백제를 영향 하에 넣었다는 뜻을 내포할 가능성이 있다.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 中央大學校 文學部)교수는 왜의 실체가 원군이었다면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제가 좀 더 전면으로 드러났을 것이라며 왜군을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태식(홍익대학교 역사교육학과)교수는 광개토왕릉비문은 결국 고구려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비문이었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이민족들까지 상대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왜군을 보다 전면에 내세웠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임진왜란 표기에 관한 논의-

이번 임진왜란 역사인식 문제에 대한 토론은 임진왜란의 일본어 표기법이 중점이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문록의 역(文祿の役)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 천황의 연호가 문록(분고쿠)이였기 때문에 번역하면 ‘문역 때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이 된다. 키타지마 만지(北島万池 · 共立女子大學 文學部)교수는 ‘문록의 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가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조선인도 일본인이 되었으니 정벌이라는 말은 쓰지 말자’는 논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 일제강점기 시대의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같은 관점에서 ‘문록의 역’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한국 측에서는 그와같은 역사인식은 한국의 식민지배를 당연시하고 영구지배를 꾀한 식민지론의 전개이기 때문에 이케우치의 역사인식이 폐기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키타지마 교수는 이에 반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케우치는 임진왜란이 조선정벌이 라는 그전의 학설에 반대하고 임진왜란은 명나라 정벌임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교수는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조선의 정벌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한일조약에 대한 논의-

마지막으로 한 · 일간의 조약문제이다.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일본 측은 구조약(舊條約)을 유효하다고 보는 데 반해, 한국 측은 무효를 주장한다. 한국 측은 1905년에 체결한 을사조약이, 일본이 한국대표에게 강한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무효이며 1910년에 체결한 한국 병합조약은 비준이 완전히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조약이 유효하다고 보는 대표적 학자로는 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와 운노 후쿠쥬(海野福壽)가 있다.

을사조약의 경우 국가 대표자에 대한 강제로 맺어진 조약은 무효라는, 당시의 관습국제법이 있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을사조약에 국가에 대한 강제와 국가대표에 대한 강제가 혼재하고 있었으므로 국가대표에 대한 강제라고 단순화 할 경우, 국제법상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한국에 그 입증책임이 있으며 이를 입증하지 못하는 한 을사조약은 유효하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또한 운노는 한국병합은 국제법상 합법으로, 조선은 국제적으로 승인 받은 식민지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창렬(한양대학교 사학과)명예교수는 “당시 제국주의시대의 국가 간에, 분쟁을 해결하기위해 전쟁이나 타민족지배로서의 식민지지배를 정당시하고 있었고 일본이 주장하는 국제적 승인이란 그들의 합의의 표현인 국제법으로서의 적법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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