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이른바 제 1세대 신여성이라 불리던 여성들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또 이를 통해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달성함으로써 여성의 개성과 평등에 기반을 둔 신이상과 신문명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이들의 주장과 행동은 여전히 남아있는 전통과 인습의 관점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 근대적 현모양처주의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파격적인 생각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저서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에서 이런 점에서 신여성들은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였다고 밝혔다.

이들이 남성지배사회에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컸지만 그들의 전성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 급진주의자들이 매우 소수였기 때문에 남성지배사회에서 쉽게 고립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전히 전통과 인습에 사로잡혀 있던 대다수 여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1920년, 여성에 의한 ‘신여성’ 운동의 단초를 연 잡지 <신여자>가 출간됐지만 제 5호가 마지막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신여성>의 공동저자 박용옥씨는 당시 사회는 ‘신여자 운동’을 사회 운동으로 확대할 만한 사회층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또, 신여성 대다수가 근대와 전통의 것을 동시에 따르는 이중성을 보여 그들에게서 모순적인 결과들을 야기했다. 인습을 타파하지 못한데다가 식민지 체제하에 놓여있던 낙후된 사회는 이들에게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까지 키우게 만들었다. 결국 민족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신여성들의 의식과 자아는 분열됐으며 자기모순은 심화됐다.

또한 일본제국의 판도가 확대되자 식민지 신여성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 중 민족주의 이념에서 자라난 일부는 민족을 제국으로 대체하면서 여성을 제국의 적극적 협력자로 동원하고자 했다. 김활란, 박인덕, 유각경 등의 적극적인 친일행위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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