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부터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아 근대적인 사고를 지닌 지식인 계층의 여성들, 이들은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부상해 사회에 그들의 목소리를 냈다. 단발머리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던 ‘신여성’으로 불리던 여성들은 누구일까.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꼽히는 사람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었던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나혜석은 화가로서의 능력만을 보인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활동을 했다. 그녀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남녀평등을 알리며 구습 타파를 주장했다. 작가로서도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을 다룬 소설을 발표하는 등 인정받는 활동을 했다. 이로써 나혜석은 조선 여성의 해방과 자아의 각성을 외친 선구적인 신여성으로 최근 재평가 받고 있다. 또,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만주 안동현에서 민족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최린과의 스캔들로 인해 1930년에 이혼 당했고 그 이후에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자신의 신념을 따라 행동했지만 결국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다.

제1세대 신여성 작가의 대표적 인물로 지칭 되는 이는 김원주(호는 일엽)이다. 김원주는 1920년에 창간된 여성지 <신여자>의 최초의 여성 주간이었다. 그녀는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와 일정한 모임으로 과부, 시어머니들이 바깥 생활을 한다면 고부 갈등 같은 것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선진적인 제안을 내놓았으나 현실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또, 여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구성원으로 사회적 역할의 실천을 중시했다.

한편 여의사로 일제시대를 살았던 이영실이 있다. 이영실은 여의사라는 직업에 있어 여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인식으로 의사로서가 아닌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에, 이러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여성도 의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성악가로는 윤심덕이 신여성의 면모를 보였다. 동경음악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조선에서 음악교사와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했다. 또 경성 방송국에서 대중가수로, 극단 토월회에서는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조혼의 피해에 대해 다룬 내용을 일본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윤심덕은 1926년 8월에 극작가 김우진과의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신여성과 기혼 남성의 연애가 가져온 사건으로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설립을 시작으로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나면서 여성 교육자도 증가했다. 교육을 받은 여성 중 가장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고 활동한 분야가 교육 분야였다. 차마리사(아명 차섭섭)는 16세에 남편을 잃었다. 그 이후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했다. 귀국한 후에는 배화여고 교사로 재직했다. 차마리사는 여성 중에서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여성들을 교육을 통해 그 위치를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1925년에 이혼녀, 과부 등 소외당하는 여성을 위한 근화학교를 설립했다. 현재 차마리사는 여성 교육을 통해 여성 의식 계몽을 한 인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기자로서 활동한 △김경숙△허정숙△김명순△이현경 등이 신여성으로 불리고 있다. 여의사로는 △허영숙△현덕신△정자영 등이 있었으며, 교사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박사 김활란△손정규△최활란△윤성덕△박영애△이보경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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