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동랑 유치진(1905~1974)은 여러 면에서 한국 신극 1세기동안에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는 평생 연극인으로서 누구도 넘어서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극 1백년동안 극작이라든가 연출, 연기 등 연극의 한 장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적지 않다. 그러나 유치진처럼 극작으로 시작해 연출, 연극교육, 연극이론, 극장설립 등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기면서 폭넓게 활동한 인물은 거의 유일하다. 그만큼 다면적 마스크의 선구적 연극인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뒤로 밀린 이유는 순전히 일제 말 소위 국민연극시대에 타의에 의해서 친일 연극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랑은 어떤 삶을 영위하면서 연극운동을 했을까.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에 경남 통영군 거제면에서 중농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바로 밑 동생이 그 유명한 시인 청마 유치환이다. 향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잠시 우편국에서 일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육열에 불탄 나머지 도일(渡日)해 릿교대학 영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서양연극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가 중학시절 우연히 로망 로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민족계몽운동을 하려면 행동성이 강한 연극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문과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대학시절 우리와 비슷한 운명의 아일랜드 극작가들, 이를테면 숀 오케이시라든가 씽그 등에 심취해 그들에 대한 졸업논문까지 쓰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해외문학파들과 어울려서 1931년에 극예술연구회라는 본격 신극단체를 조직하고 서구근대극을 이 땅에 이식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편 <토막>을 위시하여 <소> 등 최초의 사실주의 희곡 여러 편을 써서 식민지시대의 암담한 우리현실을 무대 위에 형상화한다. 일제는 그런 그를 탄압해 사실주의 극에서 역사극으로 회피케 하고, 다시 극단 현대극장을 만들어 <흑룡강> <북진대> 등의 어용극까지 쓰도록 한 것이다. 이는 유치진 개인의 좌절 아닌, 한국 신극의 패배였다.

해방과 함께 동랑은 친일의 참회로 돌베개를 베고 1년여 은둔생활을 했다. 좌우익의 혼란기에는 다시 등장해 <조국> <자명고> 등 외세배격을 주제로 한 희곡을 쓰는 한편 국립극장 설치운동을 편다. 1950년 4월 아시아 최초의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그는 초대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신협을 조직하고 자신이 쓴 역사극 <원술랑>으로 화려한 막을 올림으로써 민족연극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6.25전쟁이 발발해 모든 것이 무산됐고 피난지에서 <순동이> 등과 같은 목적극과 <가야금> 등의 전통 소재극을 쓰게 된다. 그만큼 그는 계몽주의자였다. 1956년 연극세계일주를 다녀온 뒤에는 극장 드라마센터 건립에 나섰고, 그것을 통해 전쟁으로 침체된 연극의 부흥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중이 호응해주지 않자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인재양성과 전통연극부활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결국 연극은 인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드라마센터에 연극학교를 만든 것이다. 그곳은 뒷날 서울예술전문대학이 돼 수많은 연극인과 탤런트, 가수, 작가, 영화감독 등을 배출했다. 동랑은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근대화에 밀려 사라져가는 전통연극, 가령 탈춤이나 남사당패의 예능 등의 복원에 나섰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탈춤이 전국적으로 복원돼, 전수되고 있다. 그리고 탈춤, 남사당패 등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으며 예능인들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오늘날 전국에 전수회관이 여럿 세워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다.

동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 키우기’에 자신의 연극인생을 걸었던 그는, 1960년대 초 동국대학교에 연극학과를 설치하고 드라마센터에 연극워크숍이라는 기구를 둬, 신인극작가 양성에도 앞장섰다, 신춘문예 당선 극작가들을 위한 특별 공연을 정기화한 것도 바로 그였다. 전쟁이 끝나 뒤인 1955년도에는 전국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를 만들어 청소년기부터 배우를 양성했다. 그리고 장기적 안목을 갖고 어린이극도 발전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인형극을 권장하는 일을 죽기 직전까지 했다. 그만큼 한국연극의 기초 인프라를 만드는데 전력했다.

그는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인재양성과 극장 만들기에 주력했다. 극장도 드라마센터라는 대단히 선진적인 것이었다. 드라마센터는 종래의 프로시니엄(Proscenium) 무대를 혁파하고 원형 돌출무대를 만들어 연극의 다양한 실험을 가능케 한 것이다. 1970년 초에 유덕형, 안민수, 오태석 등이 실험극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유치진이 그러한 극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장차 뮤지컬이 연극의 주류로 떠오를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1962년에 <포기와 베스>를 뮤지컬로 만들어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 바 있다. 뮤지컬이 어떤 연극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그는 벌써 2, 30년 앞을 내다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연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뮤지컬이 연극계를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뮤지컬 관객이 연간 1백만 명이 넘고, 시장도 곧 2000억 원 규모가 된다. 뮤지컬이 영화 다음으로 문화산업의 주 품목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그 단초를 연 사람이 바로 유치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행동에 앞서 언제나 자신의 신념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미 20대 시절부터 수많은 글을 썼는데, 가령 <조선연극의 앞길> 같은 글이 대표적이다. 특히 <희곡론> 등 계몽적인 글도 적지 않게 써서 연극지망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연극을 이해하도록 배려한 것도 돋보인다.

이처럼 소위 리얼리즘 희곡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서 무대에 올렸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며 전통연극 복원과 새로운 모델의 무대로 실험극을 가능케 했다. 특히 뮤지컬의 가능성을 일찍이 예언하고 시도함으로써 한국연극이 세계연극의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게 한 것이야말로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유민영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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