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극도의 절정을 나눈 후 그의 목을 베버린다.
성의 연구가로서 일반인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는 아마 프로이트와 킨제이 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인간을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성본능과 죽음 본능이라는 두 개의 본능을 쫒아 사는 동물로 간주하여 그의 정신분석학을 정립했고 킨제이는 빈도수, 행위방식, 나이, 직업, 계급 등의 관찰로써 성의 통계학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저주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Felix-Henry Bataille, 1897~1962)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뒤흔들고 킨제이의 통계학을 뒤엎었다. 바타이유는 정신분석학이 구체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이론으로 귀결된다고 비판하며,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는 피관찰자의 이야기에 의존하는 킨제이의 노력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바타이유는 민족학자 마르셀 모스, 정신분석학자 쟈크 라캉, 철학자 코제프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코제프 교수에게서 헤겔에 관한 강의를 듣는가 하면, 보리스 수바린느의 영향으로 트로츠키 그룹에 가담해 <사회비평> 의 주간을 맡아보기도 한 그는 다방면에 관심이 있었다. <종교의 이론> (1948), <선사시대 그림연구> (1955), <문학과 악> (1957), <에로티즘> (1957), <에로스의 눈물>(1961), <불가능> (1962) 등. 그의 저작을 훑어보면, 경제학, 종교사, 생물학, 민족학, 문학, 미술 등등의 다양한 분야가 그에게서는 끄트머리만 겨우 맞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를 이룸을 알 수 있다.

저주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 문학사가들은 그를 그렇게 분류한다. 바타이유는 인간사회의 두 가지 무질서의 인자를 든다. 죽음과 에로티즘이다.

그러나 둘은 하나이다. 바타이유에게는 에로티즘의 순간 그 자체도 죽음의 축소판, 그래서 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절정의 순간 암컷과 수컷은 무한한 범람과 극도의 착란 속에서 몸부림치며, 황홀하게 의식을 잃고, 마침내 심연으로 빠져들지 않던가. 에로티즘과 죽음이 두 가지 중요한 금기와 위반의 주제가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바타이유는, 특히 <에로티즘 역사>에서, 문화와 문학에 스며있는 위반의 역사적 뿌리를 캐내는 일에 몰두한다. 결론은, 인간의 역사는 금기와 위반의 역사이며, 금기와 위반은 인간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금기를 폴리네시아에서는 타부(tabou)라고 부른다. 뒤르켐은 타부를 “초자연적인 원리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사물이나 그런 사물들의 한 범주와, 이러한 특성을 갖지 않거나 설령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정도가 아닌 다른 사물들 사이의 모든 접촉을 막음으로써 마술적인 전염이 초래되는 위험한 결과들을 예방하고자 하는 일련의 의식적 금지조항”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타부는 하나의 단언적 명령으로 제시된다. 그 어떤 도덕적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그것은 단지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타부 즉 금기가 된 순간 그것을 어긴 행위는 징벌의 공포와 더불어 이전에 볼 수 없던 신성한 종교적 후광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싸드를 인용하여 바타이유가 말하고 있듯이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그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것을 제한하는 방법 밖에 없다”. 금기의 대상이 신성한 공포와 더불어 지극한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신성하다. 바타이유에게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바타이유는 미적 기준에 관한 한 개인차는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비록 단순한 미적 기준에 불과하지만 바타이유는 신체를 “동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으로 꼽는다. 그리고 그 신체적 조건은 “원칙적으로 젊음을 전제한다”.

바타이유에 의하면 우리가 혐오하는 부분은 인간의 동물적인 부분이다. 신체기관들은 형태적으로 볼 때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지만 여자의 아름다움은 물질적 속성과 기능으로부터 멀게 느껴질 때, 즉 자연의 하중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돋보인다. 요컨대 “여자는 동물처럼 보이지 않을수록, 신체적, 생리적인 모습이 덜 드러날수록, 즉 현실에서 멀수록 더한 욕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정반대의 사실도 부인하기 힘들다. 만약 어떤 여자가 “동물성을 암시하거나 예고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더 이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할”것이다. 동물성이 깃들인 부정적인 아름다움은 우리의 욕망을 일깨우며, 욕망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동물적인 부분을 열광적으로 탐닉하기에 이른다.

인류가 정한 금기의 대상은 대개 인간에 내재한 동물성으로서 성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알몸을 보이지 않기, 시체와의 접촉 금지 등은 모두 동물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환언하면 금기의 위반은 결국 동물성으로의 회귀인데, 하지만 이 동물성은 원래의 본능적 동물성이 아니라 이미 신성화한 동물성이다. 그러므로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금기의 위반은 곧 신성에의 돌입이 되는 것이다.

학계에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이던 에로티즘은 1927년 폰 엔글리쉬 박사가 <에로티즘 문학사>를 저술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진지한 옷을 입는다. 후고 하인의 <독일의 흥미로운 에로틱 도서>(1929), 프랑스 작가 자크 고르빌의 <유럽의 에로티즘사>(1933)등 에로티즘 문학에 관한 사전과 참고서적들이 꾸준히 출간됐지만, 비교적 20세기 초 성담론을 자유롭게 한 이들은 클로소우스키, 장 쥬네 그리고 바타이유이다.

바타이유의 문학적 동기는 한 마디로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즉 성금기의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이다. 많은 문제 중에서, 에로티즘은 가장 신비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엉뚱한 것이다. <눈의 역사> 와 같은 추문의 역사서들, <파란 하늘>과 같은 소설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에로티즘은 그의 책들을,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에로틱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다른 책들과 구분시킨다. 반은 인간적이고, 반은 신적이고, 반은 지상적이고, 반은 천상적인 그의 에로티즘은, 따라서, 가장 은밀한, 또는 과감한 욕망이 현실적으로 드러날 때의 착란적 상상도 아니며, 그런가 하면 그의 에로티즘은 싸드의 방탕이야기도 아니다.

바타이유에게 있어서 에로티즘은 인간 정신의 정상을 차지하는 에로티즘이다. 그의 에로티즘은 고독, 침묵, 극단과의 대면, 즉 죽음과의 대면이다. 그래서 에로티즘은 폭발과 소진의 현주소이다. 분리된 개체가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소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의 제거, 용해, 폭발적 용해이다.
조현경(전북대 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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