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유코

신경숙씨의 『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지금 우리 곁에 누가 있는 걸까요』는 사랑하는 아기를 잃은 부부가 죽은 아이의 환영을 경험하면서 부부간의 갈등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읽고서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제로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 사회는 실제로 보이고 들리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풍조가 심한데요. 심지어 의미야 어떻든 ‘반드시 보이거나 들려야 한다.’는 공포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라 생각됩니다. 이처럼 가시적인 것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신경숙씨의 작품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는 않더라도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문학이 해야할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또, 신경숙씨는 작품을 통해 이 세상과 저 세상 혹은, 도심에 사는 현실과 두고 온 고향의 세계처럼 병행이 불가능한 두 세계 사이에 항상 걸쳐 있으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처럼 자아와 타인의 구분이 모호한 채, 사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상상력과 유연함이 신경숙씨의 작품이 갖는 매력인 것 같습니다.

신경숙                               

작가라면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요.(웃음) 작가는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작가가 어딘가에 정착해서 안주한다면, 그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작가는 늘 불안해, 이리 가도 아닌 것 같고 저리 가도 아닌 것 같아서 자꾸만 움직이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 쪽과 저 쪽, 그 가운데에서 양쪽의 끊어진 관계를 언어로 조금씩 이어주는 것이 작가가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병익

인칭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한국 문학과 일본 문학 내에 인칭과 관련해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예로, 한국에서는 아내를 가리킬 때 ‘우리 집 사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에는 한국인의 집단 의식, 공동체 의식이 담겨있습니다. 한국 문학에서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은 최근에서야 도입됐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경숙씨의 작품입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조금 더 일찍 ‘나’라는 인칭을 사용해서 ‘주인공’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쓰시마 유코씨의 『아이를 버리는 이야기』(『아이를 버리는 이야기』는 미혼모가 경험하는 내적 시간을 표현한 소설이다.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센코’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을 설정, 고유명사와 인칭 대명사의 구분이 모호하다. 이는 토속적 의미와 현대 사회의 이미지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를 읽으면서 ‘인칭’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쓰시마 유코

현재 일본의 여성들은 이혼, 미혼모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통마저 산산히 부서진’ 여성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고통받는 여성을 소설에서 표현할 때, ‘여성’이란 인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상징화된 3인칭’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후즈이 사다카즈

그렇다면 신경숙씨는 왜 ‘나’라는 인칭을 사용하십니까?

신경숙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나’라는 인칭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 작품에서 ‘그’라는 인칭으로 묘사한 대상을 ‘나’라고 바꿔봤는데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저는 ‘나’라는 인칭을 써야할 때, 오히려 ‘그’라는 다른 시선으로 쓴 적도 있습니다.

후즈이 사다카즈

한국과 일본은 ‘3인칭’시점을 사용하는 법을 유럽에서 배워왔습니다. 일본 문학 중에는 3인칭을 1인칭으로 바뀌어도 상관없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고, 제 작품 중에도 그런 작품이 있는데요. 인칭 문제가 ‘객관적인 시각이냐 주관적인 시각이냐’는 문제와 관련 있다는 점에서 아직 우리 사회 내에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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