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한 이래로 나는 고대신문에서 고대문화를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고대문화에서 고대신문을 한두 번 비판한 적이 있지만 고대신문 측에서는 그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인지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언론이란 어때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관한 한쪽의 주장이 아닌 여럿이 참여하는 논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너무나 아쉽다.

그러던 중 익명을 요구한 한 독자(이하 익명학우)가 올린 이 글은 처음으로 고대문화가 아닌 다른 고대 구성원 측에서 “언론이란 어때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글이라 참 신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익명학우가 올린 글에 동의할 수가 없다. 다만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익명학우의 글은 완전히 틀린 글이다.

익명학우의 언론관은 각 문단의 첫째 줄들에서 발견된다. “마치 무엇인가로 부터 쫓기듯이, 누군가를 비판하고 공격하지 않으면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위기를 느끼는 듯이 보인다.”, “이미 주류에서 밀려나 공허한 이상주의에 머무르는 시대착오적인 관점의 기사”, “줏대없이 싸움이라면 무조건 지지하는 성향” 등등.

익명학우는 마지막 문단에서 “중립적인 문제제기/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며 글을 마친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인용한 ‘첫째 줄’들에서 볼 수 있듯, 익명학우는 중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문화와 다른 특정 정치적 지향을 바라는 것 같다. 익명학우의 현실 인식은 고대문화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자신과 고대문화의 관점이 다른 것을 가지고 “언론의 중립성”을 운운하는 것은 무언가 방향이 어긋난 것 같다.

우선 독자와 고대문화 편집진의 사회인식 중 어떤 인식이 옳은 인식인지는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나는 다만 독자가 자신과 고대문화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언론의 중립성” 문제로 끌고 가는 것이 틀렸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1. 실제 언론의 모습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언론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의문시되지 않는 절대명제가 있다. 하지만 언론은 중립적일 수 있을까? 그 가능성에 앞서, 그동안 중립적인 언론이 존재한 적은 있었나? 외국의 사례를 거론하면 장황할 것 같으니 국내 언론사들만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한국 언론계에 대표적인 두 신문사인 조선일보과 한겨레신문을 보도록 하자. 조선일보는 자신이 항상 “옳은 가캇를 수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들의 의견이 중립적이지는 않더라도 ‘표준 한국인의 입장’인 것처럼 말한다(국민, 여론 등의 단어를 자주 들먹인다는 점). 하지만 그들의 보도 태도는 그렇지 않다.
2004년 노무현 탄핵 때 조선일보는 극소수의 탄핵 찬성자들과 대다수의 탄핵 반대자들을 동등한 비중으로 보도했다.

반대로 순복음교회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집회 때에는 그 반대자들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았을 때는 이건희 회장을 옹호하는 주장만 폈을 뿐 그를 비판하는 주장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비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경제면에 삼성의 ‘엄청난’ 수출실적 등을 1면에 올리며 삼성을 은근히 옹호하기도 했다. 부산 APEC 때는 APEC을 찬양하는 목소리만 잔뜩 실었고, 사학법 개정때는 전교조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물론 그들의 주장은 아주 작은 비중으로만 다뤄졌다.) 전교조가 교사 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권력기관인 양 묘사했다.

이번에는 한겨레신문을 보도록 하자. 한겨레신문은 동아일보에서 정론직필을 하다가 쫓겨난 기자들이 창립한 신문사다. 그러나 한겨레 신문사는 노동해방이나 자본주의 비판을 하는 ‘좌파언론’이 결코 아니다. 한 예로 한겨레 신문사는 민주노총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민주노총에 대해서 타협노선으로 가지 않고 투쟁노선으로 가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식의 보도를 자주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부산 APEC 회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역 자유화의 어두운 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가 약간 있었으나 대체로 한겨레는 APEC의 ‘성공적 기원’을 바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또한 한겨레신문사는 기자들의 정치활동을 완전 금지하고 있다.

이처럼 각 언론사는 현실의 여러 가지 측면을 다 보도하지 않는다. 편집진에 의해 선택된 몇 가지 사실만 보여줄 뿐이다. 조선일보한테 “어떻게 탄핵 찬반 의견을 동등하게 싣는게 공정한 거냐?”고 따지거나, 한겨레신문에게 “왜 너희는 APEC의 좋은 면만 강조하느냐?”라고 따지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이들은 공정성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행동한다. 각 언론사마다 1면 보도가 다르고, 사설이 다르고, 사설 내용이 다르고, 전반적인 기사 배치가 다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2. 학내 언론 비교
이런 점들은 학내 언론에서도 관찰된다. 여기에서는 고대문화, 석순, 고대신문, 고대Today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고대문화와 석순의 경우, 자신들의 ‘편향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단체의 편집진은 내부적인 토의를 거쳐 특정 편향성을 지지하기로 결정내린 것이다. 따라서 고대문화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고(물론 익명학우에게는 이것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통합을 저해하고 갈등을 양산하는 폭력사태”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석순은 그동안 무시되어온 여성의 시선, 그리고 여성들의 처지와 비슷한 다른 소수자들의 시선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 두 언론에 내려진 주된 비판은 “그래도 교지대를 받는 공식 교지인데 이렇게 편향되어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교지대 분리납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이제 효과가 없다. 고대문화와 석순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들의 색을 지키면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내용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 교지대를 내거나 내지 않으면 된다. 나는 이들을 지지하므로 교지대를 낼 것이다. 익명학우와 같은 사람은 이들 언론의 방향에 만족스러워하지 않으니 교지대를 내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록 특정 신문을 구독하고 있지는 않으나 항상 기성 신문들을 비판하고 있다. 다만 ‘언론의 중립성’이라는 명제를 들이밀며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본질과 무관한 빗겨나간 비판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고대문화, 석순에 비해 고대신문과 고대Today는 ‘모든 고대인들을 위한 언론’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고대문화, 석순이 그러하듯, ‘어떤 고대인’의 입장을 다른 고대인들보다 중요시하고 있다. 즉, 이들도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학내 주요 쟁점마다 고대신문, 고대Today는 학교와 재단 측의 입장을 사실상 충실하게 대변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고대신문은 주로 학교측의 입장과 학생회측의 입장을 5:5의 비율로 보도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건희 학위수여, 등록금 문제, 정통대 문제 등에서 결정권이 있는 측은 항상 학교 측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보도를 하려면, 결정권 없이 일방적인 학사행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좀더 큰 비중으로 다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학교 홍보팀에서 만드는 고대Today는 일반 학생이나 학생회측의 입장을 사실상 무시한다. 학교측의 공식 입장과 다른 고려대의 목소리는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2006년 개강호를 아무리 살펴봐도 새터, 학생회 선거 등의 언급은 아예 없다. 현승종 이사장이 새로 부임했을 때는 그에 대한 칭찬만 많았지 그의 친일행적, 교총활동, 건국대 이사장 활동 등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등록금 문제나 대학의 기업 종속화에 대해서도 그것의 필요성만 역설하고 있지, 그것의 이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편향된 시각을 가진 고대신문과 고대Today에 한 학기에 각각 수억대의 등록금을 들여 만든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솔직히 고대신문과 고대Today에 내 등록금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 이들 역시 단순히 ‘학교 공식 언론’이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고대문화와 석순처럼 지지도 여부에 따라 돈을 받아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쟁시스템 아니던가?

나는 이 두 언론이 편향된 시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특정한 논조가 없는 체 하면서 일괄적으로 등록금에서 운영비를 받아가는 것에 반대할 뿐이다.

3. ‘중립’적 언론사보다 명확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펴는 언론사들이 많아지기를
객관성, 중립성 등의 용어는 참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단순히 50대 50으로 딱 잘라서 이쪽과 저쪽의 의견을 실어주는 것이 꼭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언론 편집진이 하나님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언론매체를 만드는 것도 사람인 이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론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다만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한 판단들이 존재할 뿐이다.

되지도 않을 중립성을 가장하는 것은 오히려 ‘편향’된 결과를 낳는다. 고대신문의 ‘개강투쟁 선포식’ 기사를 보면 등록금 투쟁을 시작했다는 의의와 함께 200명이라는 ‘저조한 참여’라는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홍보도 부족한 상황에서 금요일 2시에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는 것이 과연 저조한 참여일까? 그리고 고대신문에서는 등록금 문제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이 전혀 없다. 학교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지만, 그 학교발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발전을 위한 돈이 실제로 부족한지 따져봐야 할 일이다. 학교의 발전이라는 것은 단순히 세계 몇 위라는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대신문은 학교측에서 주는 보도자료를 사실상 발표할 뿐이었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다.

추상적 모델에 입각한 이론 속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현실 속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막연하게 중립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결국 현상 유지를 바라는 특정 집단에게 편향된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익명학우도 결국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편향성(정치성향) 쪽으로 보도가 나지 않으면 그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우선 그가 쓴 글만 가지고 그의 정치적 성향을 추정해 보자면, 그는 고대문화에 주류적인 시각이 더 많았으면, 그리고 여러 가지 투쟁에 대해 맹목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같다. 그와 더불어 ‘중립적’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고대문화는 이미 ‘중립적’인 토론의 장을 열어놓고 있다. 비록 4페이지에 불과하지만 특정 주제에 관한 양측의 입장을 50:50으로 보여주고 있는 꼭지가 하나 있다. 하지만 고대신문은 어떠한가? 어윤대 총장의 각종 연설문은 꼬박꼬박 실어주면서 등록금 때문에 힘겨워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주간지의 성격상 월간지보다 각종 토론을 하기에 훨씬 유리한데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고대문화는 항상 그러했듯 여러 가지 투쟁들을 거의 항상 옹호한다. 대학에 다닌 4년동안 이렇게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는 언론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주장이 맹목적이고, “줏대없는”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작년에 고대문화에서 노동귀족과 관련된 기사를 본 적 있는데, 그들은 ‘중산층’이었지 귀족이 결코 아니었다. 중산층이 무너져가고 있는 이 때에 중산층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왜 욕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보면 KT에서 해고된 5500명의 노동자들이 지금 대부분 최저생계비도 못벌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의 ‘편향된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이 대부분 높은 수준의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고대신문을 통해 “언론이란 어때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고대신문도 단순한 사실보도가 필요할 때에는 사실보도가 필요하겠지만, 가치가 충돌하는 문제(등록금, 학사행정 등)에 있어서는 사실보도 그 이상의 것, 고대신문 편집진들의 합리적인 논의와 결론이 담겨있는 기사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과대학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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