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낙엽, 차고 단단한 바람 등의 자연현상으로 말미암아 유년시절부터 나의 11월은 항상 ‘우울 모드’였다. 괜한 상념에 젖어 인생이나 죽음 등을 논하는 글에 빠져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던 늦가을은 고려대학교에 출강하면서부터 작은 변화를 맞게 되었다.

벌써 출강한지 6년째, 올 11월에도 어김없이 고려대학교 고전음악감상실 주최의 작은 음악회와 만나게 되었다. 단지 학부와 대학원에서 고전음악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심사위원석에 앉아 참가자들의 연주를 심사하는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해마다 작은 음악회의 포스터와 팜플렛에는 부끄럽게도 내 이름 석자가 인쇄되었고 난 그것들은 집으로 가져와 영구 보존해야 한다며 앨범에 정리해놓거나 가족들 앞에서 큰소리치며 꺼내 놓은 우스운 기억도 있다.

강의실이 강당인지라 자주 지나게 되는 정경대 후문을 들어서면 언제나 ‘홍보관 매점에서 차를 한 잔 마시거나,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고전음악감상실을 들러봐야지!’  하는 기쁜 상상이 나를 기다려 주었다.

이번 작은 음악회는 타대생으로까지 참가자들이 확대되었기에, 다양한 장르의 연주에 대한 심사기준을 선정해야 하고 본선 출연자 인원을 제한해야 하는 즐겁고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었다. 결국 예선의 연주 시간을 2분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연주자 본인이 고난도의 기교적인 부분이나 중요한 주제선율이 나타나는 부분으로만 편집해서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인촌기념관에서의 본선!

성실과 노력, 재능과 끼로 무장한 엘리트들의 음악을 향한 놀라운 열정은 무대 위에서 빛이 났다. ‘이 출연자 모두를 음악 대학이나 어느 콩쿠르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입상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놀라운 기억에, 지금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심사평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년부터는 심사를 맡지 않고 싶을 만큼’ 어렵고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진행될 때마다 내가 갖게 되는 긴장과 손 떨림은 더해갔고 연주자들은 더욱 차분해져만 갔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열띤 경쟁을 보여주었던 피아노 연주자들, 완벽하게 구성된 오페라 무대처럼 보였던 이중창, 고려대학교 오케스트라 구성원들의 피아노 트리오, 따뜻하고 밝은 음색의 클라리넷과 피아노 반주의 경쾌한 조화, 거의 모든 관객이 숨죽여 지켜봤던 정교한 기타 연주…. 음악회 내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완벽한 음악적 세팅이 ‘경이적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지나친 표현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저서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감정의 기억을 많이 가진 자는 몸 속 난로에 불을 피는 것과 같아서 그리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나 역시 작은 음악회를 통하여 얻게 된 감정의 기억들로 내 안의 난로는 올 겨울 내내 따뜻한 불을 피울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2002년 11월 8일, 늘 그랬듯이 작은 음악회는 내게 큰 기대와 거대한 감동, 어마어마한 무게의 반성을 느끼고 생각하게 했다.

이제 2003년부터는, ‘작은 음악회’를 ‘큰 음악회’라는 명칭으로 바꿔야하지 않을까?

멋진 시간을 마련해 준, 고전음악감상실  실원들 모두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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