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미디어를 도외시하는 원시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가 아니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름이다. 국민배우 최진실과의 결혼, 파경, 그리고 지지부진한 법정 투쟁 끝에 다다른 이혼이라는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생활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특종에 목말라있는 언론사들의 단골 1면 기사거리다.

그러나 ‘연예가 중계’ 의 조성민을 모르는 이는 없으되 ‘그라운드의 귀공자 조성민’을 기억하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비록 지금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진흙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기에 그 본연의 빛을 잃어버렸다고는 하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던 찬란한 오로라의 눈부심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는 결코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되는 비운의 스타이다.


<조성민......그의 화려했던 마운드>


조성민은 고교 재학 시절부터 한국 야구계를 흥분시켰던 거물 중에 거물이었다. 신일고 재학시절 팀을 전국 대회 2관왕(봉황대기/황금사자기)으로 이끌었고 MVP를 2번이나 수상한 초특급 투수가 바로 그다. 돈 다발을 무기로 한 프로 구단의 매혹적인 러브 콜을 뿌리치고 당당히 안암골에 입성한 그는 대학 야구 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 고대시절의 조성민

▲ 신일고 시절의 조성민

 

 

 

 

 

 

 

 

조성민이 입학했던 1992년은 너무도 많은 인재들이 한꺼번에 대학 무대로 몰리며 전례가 없는 수준높은 리그가 구성되게 된다. 세인들은 ‘92학번의 전설’이라는 화려한 미사여구로서 그들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러한 92학번의 선두주자가 바로 조성민이었던 것이다.

성민이 입학했던 1992년은 너무도 많은 인재들이 한꺼번에 대학 무대로 몰리며 전례가 없는 수준높은 리그가 구성되게 된다. 세인들은 ‘92학번의 전설’이라는 화려한 미사여구로서 그들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러한 92학번의 선두주자가 바로 조성민이었던 것이다.

< 그라운드의 귀공자 조성민을 기억하며...>
운동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센스는 단숨에 그를 슈퍼스타 덤에 올려놓았고 4년 내내 고대의 에이스로서,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출중한 야구 실력은 그의 폭발적인 인기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탄탄한 선로가 되어주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를 모르는 이는 없으되 한양대 재학시절 박찬호가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최고의 투수가 바로 92학번 동기인 조성민 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장밋빛 미래가 예약되어있던 조성민에게 하늘이 허락한 운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해마다 계속되는 부상과 결혼 실패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지금 세인들의 머리 속에 그는 그저 최진실이라는 유명 연예인과 결혼했다가 실패한 그런 이로 밖에는 기억되고 있지 않다. 조성민 ... 그에게 있어서 고대의 붉은 유니폼은 그의 야구 인생의 마지막 열정의 상징이 되어버렸고, 95년 정기고연전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마지막 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 그라운드의 귀공자 조성민을 기억하며...>


사실 지금에 와서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은 그가 단순히 야구를 잘했다거나, 사회적 풍파를 이끌고 온 뉴스메이커라서가 아니다. 망가져가고 있는 그를 동정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고대 출신이기 때문도 아니다.

▲ 요미우리 시절의 조성민
조성민의 대학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가 존재했던 그때가 바로 대학 야구계의 마지막 황금기였기 때문이고 그 시기를 호령했던 인재들이 현 프로야구의 근간을 이룬, 이름하여 Golden Generation이었으며 그러한 Golden Generation의 선두주자가 바로 조성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닌 선수들이 몇 있었을지 모르나 팬들을 끌어 모으는 흡입력과 스타성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만한 이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1995년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일본 열도에까지 조성민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원조 욘사마'가 바로 그였다는 것과, 한국인 최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5억 +계약기간 7년>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스카우트 된 일화는 그당시 조성민이라는 한 야구선수의 가치와 그 인기를 짐작케 한다.
(요미우리는 일본에서 야구를 하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최고의 인기구단이며 현재 프로 선수를 통틀어서도 7년이라는 다년 계약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

그가 있었음에 대학 스포츠는 발전할 수 있었고, 조성민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기에 그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열정적면서도 맛깔스러운 대학 야구의 재미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은 그를 그라운드의 귀공자라는 아름다운 칭호와 함께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얼마전 대학 야구 추계리그전을 관람하기 위해 동대문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기를 느낄 정도의 적막함과 한산함 속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한 마디의 욕설을 응원 삼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고 있는 선수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조성민이라는 슈퍼스타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각종 루머에 휘둘리며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러한 조성민이 아닌 붉은 유니폼에 갈기 머리를 휘날리며 잠실 마운드를 호령하는 고대의 에이스 조성민을 기대한다.

<조성민의 통산 기록>

1973년 4월 5일 생
신일중-신일고-고려대-요미우리 자이언츠

고교시절

1991년 제45회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
1991년 제21회 봉황기 우수투수상, 홈런상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년 22전 1승 2패 11세이브 방어율 2.89, 연봉 1200만엔
1998년 15전 7승 6패 방어율 2.75,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 연봉 2400만엔
1999년 팔꿈치 수술 후 재활훈련, 연봉 7700만엔
2000년 10전 1승 2패 방어율 3.86, 연봉 6900만엔
2002년 6전 2승 무패 방어율 2.31, 10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퇴단

통산 11승 10패 11세이브, 방어율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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