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극장 맨 앞줄에 앉았다. 이미지가 여전히 새롭고 신선할 때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 위해서….”

극장 맨 앞줄에서 목을 치켜세우며 영화를 보다가 문득 나의 4년 전, 20살 때가 생각났다.

20살 나의 인생은 방황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영사기가 쏘아 보낸 필름들의 자국들이 깜빡거리는 새하얀 스크린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어두컴컴한 시네마테크 안에서 예술영화랍시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가며 영화를 탐닉하던 나의 그 때 그 시절은, 영화 <몽상가들>의 시작 부분에서 자연스레 플래쉬백 된다.

영화로 시작된 나의 20살 인생은 줄곧 영화로 연결된다. 전국의 거의 모든 영화제를 쫓아다닐 정도였다. 그러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이 영화 속 주인공들-매튜(마이클 피트), 이자벨(에바 그린), 테오(루이스 가렐)-처럼 그 땐 나도 영화에 미쳐 살았다. 그리고 그들처럼 영화 속 장면들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영화’를 모방한다. 영화 문제 내는 장면, 루브르 박물관 안을 달리는 장면, 이자벨이 자살하는 장면 등에서 이 점은 드러난다. ‘영화’와 ‘현실’을 구별 못하는 것은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68혁명 당시를 회상하듯, 자신의 전성기를 회상하듯, 프랑스 누벨바그 시절 잘 나갔던 배우들, 마를렝 조베르· 모리스 가렐의 2세들, 에바 그린· 루이스 가렐을 이 영화에 캐스팅했고, 자신의 1973년 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의 ‘에로티시즘’을 이 영화에 다시 한번 이용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개봉일이 단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오늘, 주변에서 영화 <몽상가들>을 상영하는 극장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몇몇 영화 잡지에서만 이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때(감독의 전성기) 만큼 약발이 안 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혹시, 'The dreamers' 중에는 감독 자신도 끼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榮華) 같았던 그의 영화(映畵) 인생에 새로운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결국 바보 같은 우리는 고다르의 영화 몇 편만 보고 문화혁명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거지.” 영화 <야만적 침략>에 나오는 이 대사처럼, 내 20살 인생은, 오로지 영화에 대한 경험들로만 점철된 것이었다. ‘사랑’도, ‘정치도, ‘영화’ 자체도….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사실, 영화 속 ‘장면’들일 뿐이었다.

“옛날엔 별에 별 일이 다 있었지. 그 안에서 뭘 하든 자유였으니까. 공연을 보든, 사랑을 하든….”

나의 20살 시절을 가만히 돌아보고 있을 즈음, 내 뒤에서 자꾸 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자가 영화를 보며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특히, 남녀 배우들의 성기가 나오거나 정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 사람은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했다. 불행히도 그 변태 앞에 앉게 된 나는, 그의 신음소리와 발길질 때문에 영화보기를 방해받았다. 몇 번의 부탁,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그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 충실한 듯 보였다.

   
거의 대부분,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선 요즘에는 극장 안에서 전화벨 울리는 것도 크나큰 실수인 데, 단관 시절, 충무로의 몇몇 극장 안에서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담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우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男女 커플들이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원래부터 극장은 짝짓기를 위한 공간 이었다’ 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어둠 속에서 인간은 잠재 되어 있던 욕망을 서서히 끄집어낸다. 나만의 공간이라고 느끼는 ‘심적 안정 상태’와 남을 몰래 엿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이 결합되어 어둠 속에서 영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극장을 찾는 인간의 심리가 이것 때문만은 아니라면…. 혹시 ‘반(半)’합법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는 이유가 전자든 후자든, 극장이란 공간이 ‘허상’의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속 ‘허구’의 세계에 빠지기 위해서든, ‘대낮의 어둠’(요즘엔 달밤에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이란 허상의 공간에서의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든,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면 누구든 예외 없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그 곳’에서 걸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 주인공들이 죽기 직전에, 시위 현장으로부터 날아온 돌멩이로 인해 문 밖으로 나가 시위에 동참한 것처럼, ‘몽상’ 속 우리들도 언젠가는 현실 속으로 나와야 한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극장에 어마어마한 불이 나고 알프레도(필립 느와레)가 거의 죽을 뻔한 사건이 있은 후의 ‘시네마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닌 것처럼….

내 앞에서 아름다운 육체들이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을 때, ‘에로’ 영화(그에게 있어서는)를 보며 ‘육체적’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던 그 남자를 보면서 나는 극장에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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