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말에서 11월초까지 8박9일간의 일정으로 남한의 산업시설을 꼼꼼하게 둘러본 북한 경제시찰단은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서울 구로동의 작은 기업 이레전자를 꼽았다. 시찰단은 “회사 규모도 작은데 매출이 지내(매우) 높다”며 “사장실이 따로 없이 툭 트인 공장구조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의 경제계획위원장이기도 한 박남기 단장은 이 회사 정문식 사장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개성공단에서 함께 일하자고 신신당부했다.

이레전자는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절대아성인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와 PDP(플라즈마디스플레이) 등 첨단 디지털 가전시장에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켰다. 대기업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단순한 부속품이 아니라 완성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고 믿고, 이를 실천해 온 정문식 사장의 고집스럽게 노력이 맺은 결실이었다.

정문식 사장의 학력은 ‘고졸’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청계천 앰프공장에 나가야할 만큼 어려운 처지에서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공장 밥을 먹은 정 사장은 누구보다도 직원들의 어려움을 잘 이해한다. 그는 고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말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고 토로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졸’은 노무현이다. 또 한번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재벌의 아들’정몽준을 물리치고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단일후보로 뽑히는 짜릿한 역전극을 연출했다. 이제는 ‘내로라 하는 엘리트 집안’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본선 대결을 목전에 두고 있다. 물론 노무현 이전에도 고졸 정치인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김대중 대통령도 목포상고가 최종 학력이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압도적인 개인적 카리스마에 가려 고졸 학력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은 다르다. 지난 봄 민주당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에서 ‘노풍’이 불붙기 시작했을 때 ‘상고출신(노무현) 대 서울대출신(이회창)’을 주제로 한 만평이 서울대동창회보에 실려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명문대 출신이 상고 출신에 밀려서는 안된다는 식이었다. ‘상고출신(노무현) 대 경기고 출신(김근태)’을 주제로 한 만평도 중앙일간지에 실렸다. 경기고 출신이 상고 출신에 패해 창피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이 문제는 언제라도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노무현은 하나의 상징이다. 어떤 이들은 노무현을 통해 집안도 좋지 않고, 학벌도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서민의 자식도 각자의 소중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읽기도 한다. 학벌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고졸은 여전히 약자이자 비주류다. 고졸 출신의 성공담은 그래서 드물게 있는 ‘신화’일 수밖에 없다.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갈 수록, 큰 뜻을 품고 실천하려 할 때 차별의 벽을 더 냉혹하게 조여온다. 노무현의 도전,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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