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홈볼트대학 문화학과의 교수로 재직중인 프리드리히 키틀러(F. Kittler)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통틀어서 가장 과격한 매체이론가로 평가받고 있다. 키틀러는 1970년대에 고조되었던 후기구조주의적 ‘담론분석’을 통해 일찌감치 의미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해석학과 결별한 후, 컴퓨터의 하드웨어에서 드러나는 ‘현대 의사소통의 물질성’에 주목한다.
키틀러에 의하면 매체의 사실성은 주체나 혹은 주체의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자적 회로의 스위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화 역시 하나의 정보처리기기로 본다. 탈신화적 담론가인 키틀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역사상의 자료들을 말끔히 정리한 하나의 텍스트처리프로그램으로 평가한다. 또한 그는 『정신현상학』이 백과사전과 같은 방대한 자료수집과 그에 대한 자료처리의 흔적을 헤겔 자신이 교묘하게 없애버린, 그래서 실상은 하나의 ‘베껴쓰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키틀러에게는 철학적 저작조차도 다만 매체일 뿐 누군가의 형이상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더불어서 그는 데리다의 논법을 차용하여, 유럽철학이 ‘순수한 사유’의 사이비 휴머니즘적 속성은 유효하게 받아들이면서 정작 문자의 ‘매체적·기술적 측면’은 도외시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19세기의 정신과학은 이러한 매체의 기술적 조건이 우리 인식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조직적으로 무시하면서 구축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이론 속에서는 상징적인 모든 의사소통을 모두 간단하게 문자화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현대의 매체발달과 컴퓨터 기기가 극도로 소형화되어 감에 따라 기계가 문자를 흡수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이제는 언어조차 역사 속에 우연히 나타난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컴퓨터 기술은 이렇게 언어적 코드를 초월했기 때문에 지식의 기본 구조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한 ‘문자의 소멸’이란 키틀러의 진단은 푸코의 진단, 즉 산업혁명 후기에 새로운 사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주체)의 죽음’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진단을 한층 극단화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자면, 컴퓨터를 도구적 이성의 산물로 보았을 때 인터넷과 같은 전자매체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기술적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컴퓨터 환경 속에서의 글쓰기는 분명히 하드웨어와의 관계 속에서는 독립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키틀러에 의하면, 컴퓨터 안에서 ‘쓰여있는 것’은 ‘쓰여있지 않은 것’, 곧 이미 지워져서 눈에 띄지 않는 자료처리(프로그래밍)의 흔적 위에 쓰여진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키틀러의 ‘현대 의사소통의 물질성’에 대한 분석은 기술 자체에 대한 매체철학을 가능하게 하지만 아울러 매체발달을 규정하는 사회적 과정의 복잡성을 너무 단순화한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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