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은 송강호를 위해 만든 영화라는 평들을 많이 한다. 물론 그 때까지 조연 연기자로서 폭넓게 인정 받아온 송강호의 첫 주연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 있고, 코믹한 그의 캐릭터가 완숙기에 접어든 작품이란 점도 있다.

하지만 『반칙왕』을 ‘서사(敍事)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좀 다른 감상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야기 전개의 중심 화두인 ‘반칙’을 에워싼 ‘삼자 구도’로 보면 흥미롭다. 주인공인 은행원 임대호 역의 송강호 외에 두 조연 송영창(은행 부지점장 역)과 정웅인(대호의 동료 최두식 역)의 캐릭터는 함께 어우러져 영화 전체의 서사 구조를 이룬다.

우선 부지점장은 은행 안에서 폭군처럼 은행 근무 규칙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밥먹듯이 반칙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 가장 무서운 반칙은 ‘공포의 헤드락’이다. 레슬링 기술로 본다면 헤드락 자체는 반칙이 아니지만 항상 상대의 등뒤에서 예고 없이 공격하는 것이 비겁한 반칙이다. 맘에 안 드는 사원(특히 임대호)은 언제 어디서 불연 그의 헤드락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가장 큰 반칙은 자신이 책임 있는 간부이면서도 직원에게 부정 대출을 사주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칙이 적자생존의 원리라고 본다. 그래서 자신의 반칙을 정당화하면서 정상인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은행원 최두식은 그와 정반대로 반칙을 결코 저지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이 괴롭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지점장의 부정 대출 지시에 시달리다, 결국 그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현실의 ‘반칙왕’ 부지점장이 보는 앞에서, 남들이 예기치 않게 은행의 기물들을 부수고는 제 발로 직장을 박차고 나온다. 평소 얌전하던 그가 직장의 규칙을 보란 듯이 파괴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 자신에게 반칙을 은근히 강요해온 직장에 대해, 딱 한번 ‘반칙왕’처럼 소동을 피우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주인공 임대호는 사실 반칙을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물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반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칙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일상의 반칙’(공포의 헤드락)으로부터 해방되는 뾰족한 수가 없을까 희망하는 소시민이다. 대호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무료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거창한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단 공포의 헤드락을 거는 직장 상사의 구체적 위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간절하다. 이는 그가 태권도장과 레슬링 도장을 찾아가서나, “헤드락 푸는 방법 없을까요?” 하며 애원하듯 묻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반칙을 둘러싼 이 세 사람의 태도는 각각 현실, 이상, 환상을 대표한다.
 
부지점장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다. 그것이 지나쳐 부도덕한 짓을 하면서도 자기합리화한다. 그는 ‘현실의 반칙왕’이다. 두식은 이상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올바른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 현실에서 희생을 감수한다. 하지만 그도 한 순간에는 모든 틀과 규칙을 단호하고 통쾌하게 부수어 버린다. 그는 ‘순간의 반칙왕’이다. 대호는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서나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나 반칙을 할 줄 모른다. 다만 그는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반칙 캐릭터가 된다. 마치 반칙왕 마스크를 쓰듯이 반칙의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환상의 반칙왕’이다.

대호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극중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샐러리맨들의 일상적 삶이 배경극이고, 소심한 은행원이 레슬링을 배워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스타 프로레슬러와 대혈전을 벌여 무승부를 이룬다는 이야기는 극 속 하나의 판타지다. 대호가 일상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찾아간 세계는 - 거친 사각의 링 안이지만 - 사실 환상과 동화 속의 세계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임대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정체성은 세상과 자아 사이의 관계에서 설정된다. 대호에게 세상은 자아를 비켜 가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대호 자신은 비켜 가는 세상에 당하기 쉬운 존재다. 마치 자신이 멋지게 공중돌기를 해서 상대 선수를 드롭킥으로 찼을 때 그 공격이 표적을 비켜 가듯, 절호의 찬스와 불리한 상황이 반전되는 순간에도 뭔가 삐걱대듯 자신에게 호응을 해주지 않는 것이 세상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소통하지 못하는 대호의 처지에서도 볼 수 있다. 대호는 반칙왕의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결의를 다지지만, 아버지는 그를 정신 나간 놈이라고 파리채로 마구 때린다. 대호는 비켜 가는 세상 때문에 짝사랑하는 직장 동료 미스 조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숫기가 없어 마스크를 쓰고 사랑을 고백해야만 하는 대호를 미스 조는 매정하게 무시한다. 비참할 정도로 비켜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간 관계가 비켜 가는 ‘텅빈 소통’이라는 것은 - 관객들이 지나치기 쉽지만 - 친한 동료 사이인 대호와 두식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대호가 두식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술 한잔하기를 청했을 때, 두식은 선약을 핑계로 그 청을 묵살하고, 반면 두식이 부정 대출 문제로 고민하면서 대호에게 술 한잔하기를 청했을 때, 대호는 레슬링 도장에 가야한다는 이유로 응하지 못한다. 둘은 비켜 간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세상과 대호는 끝까지 서로 비켜 간다. 마지막 장면, 단호한 결의로 부지점장에게 복수하려는 대호, 하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려가던 대호는 현실주의자의 발치 앞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결국 ‘비켜 가는 세상’에 ‘단호한 자아’는 우스꽝스럽게 실족(失足)하고 마는 것이다. ‘반칙 못하는 반칙왕’의 넘어진 몸 위로, 사회적 조소는 초겨울 성긴 눈발처럼 날려 떨어지니, 그래도 이것이 지탱할만한 가벼움이라고 위안해야 하는가. 코미디는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간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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