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간을 논의할 때, 항상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시간이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 절대시간과 상대시간의 문제, 선형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 그리고 정지 시간이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뉴톤과 아인쉬타인 이래로 현대 물리학은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면서 시간의 의미를 탐색하고 어느 정도 해명이 됐다. 그러나 물리학적인 시간이 곧 인간 삶의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서양적인 의미에 있어서 시간은 영원성(eternity)과 현실성(now)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한 쌍의 대립적 개념을 통해서 철학적 시간과 과학적 시간을 발전시켜왔다.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이미지(a moving image of eternity)’이라고 보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전후 경험으로부터 나타나는 운동의 사건’이다. 전자의 견해는 서양철학의 시간관을 형이상학적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이끌어간 반면, 후자는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인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위의 두 층위와 전혀 다른 시간의 층위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신화적인 시간이다. 신화적 시간은 종교적 시간이고 순환적 시간이기에, 재생과 죽음의 반복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신화적 의미의 거대한 시간의 구조를 축소시킨 것이 바로 일년이라는 시간단위이며,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신화성을 띤다.  

서양사상이나 과학의 시간관은 순환적인 시간성에 관한 의식을 거세시킨다.  플라톤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년은 영원의 한 부분이고, 아리스토텔스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년은 선형적인 시간의 전경과 후경에 위치하는 하나의 사건성을 지닌 시간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서양의 철학적 과학적 인식 속에 일년이라는 단위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시간적인 의미는 인간이 어떻게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거나 아니면 ‘현재 바로 이 순간’ 자체를 향유하는 것에 자신의 의식이 집중된다.

이러한 시간관은 시간 자체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기보다는 일정한 공간을 전제로 한 시간이다. 공간성의 의미를 배제한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항상 시간에 관한 의식이 존재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시간은 칸트적인 의미에서 볼 때,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이기에 시간 자체는 체험에 의해서 파생된 경험적 개념이 아니며, 진정한 정의가 불가능하다.

칸트의 이러한 시간관과 보조를 맞추면서 근대 물리학은 시간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수행한다. 사실 물리학적인 시간은 뉴톤이래로 비가역적 절대 시간으로 인식되어져 왔으나, 아인쉬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진다. 아인쉬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가역성을 띤다. 그러나 그것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도구를 만들 때에만 가능하다.

서양의 인식적 토대 위에 일년이라는 단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 자체이다.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고, 어떻게 영원성에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점철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서양의 의식 속에 시간은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라, 늘 새로운 오늘이고 늘 새롭게 약동하는 순간이다.

김석준 (서울대 강사, 국문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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