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30일. 서있기 조차 힘든 더운 여름의 한 낮, 대전야구장에선 실업야구 선발과 일본 올스타와의 친선경기 3차전이 열리고 있었다. 날씨처럼 지리한 투수전은 관중들뿐만 아니라 그라운드에 서있는 선수들까지도 지치게 만들었다. 빡빡한 경기일정 탓으로 선수들은 체력저하를 호소했고, 감독은 선수들을 독려하며 경기를 이끌고 있었다.

막강한 일본 투수진을 상대로 1, 2차전에서 팀의 유일한 득점이 된 솔로홈런을 연거푸 터뜨린 허구연은 부상과 쌓인 피로로 경기출전이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1, 2 차전의 영웅 허구연을 감독은 어쩔 수 없이 경기에 투입했다.

인생은 ‘새옹지마’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일본의 공격 1사 1, 2루 상황, 타자가 친 공은 유격수 앞으로 맥없이 굴러갔다. 공을 잡은 유격수가 안전하게 3루로 던지는 것이 누구나 아는 야구의 정석이었지만, 이닝을 빨리 끝내고 싶은 욕심이 생긴 유격수는 공을 2루에 서있던 허구연에게 던졌다. 당연히 공이 3루에 갈 줄 알았던 허구연의 포구 동작은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고, 2루로 달리는 주자는 갑자기 날아든 공에 놀라 다리를 치켜들어 슬라이딩을 감행했다.

‘뻑’
순간 대전야구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2루수 허구연은 부러진 다리를 부둥켜 안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4번 타자라는 명함을 놓치지 않았던 야구선수 허구연은 그 날의 부상으로 선수의 꿈을 접게 됐다. 사실 수술 후 재기의 노력을 기울였고, 4번 타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당당히 돌아오고자 했던 허구연은 서둘러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상이 재발해 결국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선수 인생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던가. 누구에게나 반전의 기회는 오기 마련이다. 언제 어떻게 잡느냐가 문제가 되겠지만, 허구연은 깁스를 채 풀기 전에 그 기회를 잡게 됐다.

도서관에 출몰한 ‘4번 타자’

▲ 본교 재학시절 허구연
(출처=짠물야구bruce2.com.ne.kr)
허구연은 대학시절부터 욕심많은(?) 선수이자 학생이었다. 입학 당시 야구 특기자로 선정됐지만 그의 입학성적은 일반학생 커트라인에 근접했다. 때문에 ‘컨닝한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지만 그는 우수한 학과성적으로 이런 의혹을 잠재웠다.

시합과 시험이 겹친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시합 준비에 분주한 선수들 틈에서 허구연은 책을 놓지 않았다. 시험을 다 치루고 홀로 도착한 동대문야구장에서 그는 연타석 홈런을 터뜨렸다. 계속된 합숙과 시합으로 결석이 잦았지만,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연습이 끝나면 책을 들고 중앙도서관으로 향하는 허구연이 야구선수라는 사실을 알아챈 학생들은 ‘공부하는 4번 타자’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줬다.

그에게 법대에 진학한 이유를 묻자 “야구선수를 하면서 당당히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라는 매력적인 직업을 뿌리치고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선수’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말하는 허구연. 그는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병상에서 허구연은 다시 책을 들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라는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는 법.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법서들을 통독하기 시작한 허구연은 4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고려대학교 법학대학원생이 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 시간강사를 하고 있던 그는 야구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하고 틈틈이 고교야구 라디오 해설을 병행했다. 그러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땅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야구의 탄생을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시행했던 3S(SEX, SPORTS, SCREEN) 정책의 일환이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야구인들이 간절히 바라던 꿈이었고, 노력 끝에 얻어낸 승리의 결과물이었다.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방송사에선 훤칠한 외모와 조리 있는 말솜씨로 이미 야구인들 사이에 이름났던 허구연을 가만두지 않았다. MBC는 당시 프로야구 A급 선수와 맞먹는 계약금으로 경쟁사와의 스카우트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목전에 두고 야구중계 해설가라는 생소한 일에 뛰어들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집안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해 온 공부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잡았던 야구 배트를, 마음 속 깊숙이 묻어놨던 야구에 대한 꿈을 쉽게 지워버릴 순 없었다. 결국 허구연은 배트대신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야구에 대해 말하고, 야구만 생각하고, 야구로 성공하기 위한 첫발을 힘차게 내딛게 됐다.

‘포볼’이 아닌 ‘베이스 온 볼스’

▲ 프로야구 초창기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출처=짠물야구 bruce2.com.ne.kr)
당시 야구는 무료한 일상에 지친 국민들에게 청량음료와도 같은 존재였다. 마시면 마실수록 빠져들게 되는 그 맛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에 보답하듯 연일 드라마와도 같은 명승부가 이어졌다.

아무나 치기 힘들다는 이선희(당시 삼성 라이온스)의 강속구를 받아쳐 드라마의 첫 주인공이 된 이종도(당시 MBC 청룡) 부터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이선희의 공을 펜스너머로 보낸 김유동(당시 OB 베어스) 까지. 1982년은 만루 홈런으로 시작해 만루 홈런으로 끝난, 이선희로 시작해 이선희로 끝난 아무리 글발 좋은 작가라도 생각지 못할 드라마가 연출된 한해였다.

허구연의 성공가도도 프로야구의 흥행과 걸음을 같이 했다.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그의 해설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고, 그의 정확하고도 조리 있는 해설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그가 해설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식 일색인 야구용어를 미국식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그의 첫 시도였다. 예를 들어 타자가 볼을 네 개 얻어 1루로 걸어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포볼’이라고 한다. 볼이 네 개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일본식 표현으로 ‘베이스 온 볼스’가 정확한 표현이다.

이렇게 허구연이 미국식 야구용어를 사용하자 일본식 용어에 젖은 경쟁 방송사의 해설자, 야구계 선배들은 ‘신참 주제에 잘난 척한다’며 그를 공격했다. 또 영어 사용이 주는 거북함으로 언론과 일부 시청자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그 당시 일간지에서 허구연의 용어 사용과 관련된 사설이 세 차례나 실렸다.

하지만 허구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야구용어를 본래 의미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처음엔 호의적이지 않았던 야구팬들과 방송관계자들도 허구연의 노력에 하나 둘 그를 지지하고 나서게 됐다.

‘꼴찌 팀 꼴찌 감독’ 허구연

▲ 청보 핀토스 감독시절(출처=짠물야구 bruce2.com.ne.kr)
방송에서 보여준 그의 정확하고도 예리한 분석력은 프로구단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허구연에겐 해설가로서 성공하겠다는 확고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구단 감독직은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 쇄신을 원하던 몇몇 구단의 감독직 제의를 뿌리치며 방송에만 집중하던 허구연에게 청보 핀토스의 제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돼버렸다.

‘청보 핀토스’는 어떤 팀이었던가.
‘슈퍼스타 감사용’,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등 프로야구 초창기 인천야구에 대한 영화와 책이 발간된 이후 삼미 슈터스타즈는 물론 삼미를 인수한 청보 핀토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야구에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아마 그들이 바로 ‘만년 꼴찌’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사실 구도(球道)라 불릴 만큼 인천에서 야구는 인기 스포츠다. 박현식, 김진영 등 50~60년대 아시아를 대표하던 강타자들을 배출했던 곳이 인천이며, 인천고, 동산고 등 고교야구를 수차례 재패한 강팀들이 위치한 곳도 바로 인천이다. 이러한 야구에 대한 인천시민들의 열기가 뜨거웠지만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인천을 연고로 팀을 구성하려던 기업이 나타나질 않았다. 결국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외압(?)에 못이겨 급조된 팀이 바로 삼미 슈퍼스타즈다.

그들은 리그에 몸담았던 3년 동안 아직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들을 양산했다. 너구리 장명부에 의해 순간이나마 2위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꼴찌팀이었다. 청보 핀토스도 별반 차이가 없었으며 이 팀의 감독을 맡기란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도전정신 하나로 야구와 공부를 모두 휘어잡았던 허구연의 입맛에는 딱 알맞은 팀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야구의 풍토에서 연패라도 있게 되면 언론에선 감독자질설 혹은 경질설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것이 선수구성 문제나 구단의 문제일지라도 성적에 관한한 모든 책임은 감독에게 돌아간다. 허구연이 이것을 깨닫는데는 딱 1년이면 족했다. 사실 무턱대고 덤벼든 도전은 아니었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 본 허구연은 고향팀 롯데에서 3년간 코치를 더 경험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 미국 유학시절과 롯데 코치시절 허구연(출처=짠물야구 bruce2.com.ne.kr)


미국 유학은 그에게 좋은 경험이 됐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마이너리그 순회코치를 하며 많은 선수들을 만났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여러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다. 훗날 메이저리그 중계에서 그가 자주 언급했던 ‘저 선수는 제가 토론토에 있을 때 지도했던 선수...’라는 멘트가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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