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청우의 [인류최초의 키스](고연옥 작, 김광보 연출)는 청송감호소에 수감된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들을 심사하는 사회보호위원회와 교도관으로 구성된 세계를 아우르는, 즉 감옥이라는 제도를 존속케 하는 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극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한다. 감방으로 세팅된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사회보호위원 3인이 나란히 앉아 있고, 판사 좌우에 있는 2인은 감호 혹은 감옥이라는 제도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각각 제시한다.
한 사람은 사회를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도 같은 존재를 격리 수용하는 것의 타당성을,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이 결국은 인권유린이자 범죄자를 양산하는 제도적 장치임을 논한다. 이쯤 되면, 이 연극의 방향이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감옥이라는 제도가 환기하는 권력의 폭력성은 네 사람을 차례로 심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도관의 폭력에서 묘사되고, 이를 통해 갇힌 자와 가둔 자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공박한다.

미셸 푸코의 논의 이래 감옥이 학교·병원·공장과 함께 근대의 규율권력이 행사되는 공간으로서 널리 이해되고 있고, 문학이나 영화에서 종종 만나는 장면이기에 이 연극이 그리 새로운 화두를 관객에게 던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아 올해 다시 대학로 극장에 올려진 이 연극이 꾸준히 관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화두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자율성이 거세되고 유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설정 자체가 흥미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웃음이 배어 있는 고통과 절망을 잘 소화해낸 배우들의 개성적인 연기 또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정작 이 연극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분법의 해체와 나란히 놓은 이 연극의 지향성이다. 그것은 ‘똥’과 ‘배[船]’로 상징화된다. 7년 감호를 선고받은 학수(오달수 분)는 유전적으로 흉악범이라는 진단을 받고 보호감호가 연장되는데, 이 쇼크로 자신이 배설한 똥을 먹기 시작한다. 학수는, 자신들이 배설했음에도 더럽다고 치부되는 똥과 같은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 똥을 먹는 절망적인 행위로 자신을 위무한다.

이는 곧 자신이 쓰레기 같은, 똥 같은 존재가 맞느냐는 역설적인 항변이자 이 똥을 품어달라는 호소이다. 이 연극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으로 기록될, 학수의 똥 먹는 행위는 이 연극이 애초에 품었던 화두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일반론적 차원으로 향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은 네 수감자들이 배에 승선하는 것으로, 즉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종결된다. 한 수감자가 죽을 때마다 하얀 제복을 입고 등장하여 산 자에게 말을 건네는 환타지는, 이들에게 마지막 희망조차 거세되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죽음임을 아프게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든 타의든 그 죽음이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세상의 폭력적인 질서로부터의 해방임을 암시해준다.

결국 이 연극은 감옥 안이나 밖이나 규율권력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는 마찬가지이고 갇힌 자나 가둔 자나 모두 실은 동일한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인식에 기대어 있는 것이며, 다분히 허무주의적이고 양비론적인 이 같은 시각으로 죽음에의 충동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류최초의 키스’란 다름 아닌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함축하는 죽음에의 충동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결론 앞에서 잠시 망설여진다. 관객은 이 허무의 끝에서 죽음의 리허설을 경험하고 여전히 출구없는 비상구 앞에서 서성거리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라면 거절하고 싶다. 차라리 차가운,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으로 이 세계의 견고함을 응시하는 연극이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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