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미 국무성 통역가 통 김(Tong Kim, 한국명 김동현)씨.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부터 부시 대통령까지, 그리고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는 27년 동안 한미 정상의 대화는 모두 그의 통역을 거쳐 이뤄졌다. ‘은퇴 후 비로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요즘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강연과 집필을 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지난 26일(목) 현재 본교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그를 만났다. |
△어떻게 미 국무성 통역가가 됐나
-71년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 홉킨스 국제 관계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미국에 있던 당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로비활동으로 미 의원들을 매수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이 급격히 나빠졌다.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 나도 할 일이 없던 차에 미 국무성에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준단 말만 듣고 밥 벌이를 위해 시험을 보고 국무성에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한 길이 오늘날까지 오게 됐다.
△첫 정상회담 통역에 대한 기억은
-레이건-전두환 대통령의 회담이 내 첫 정상회담 통역이었다. 당시 레어건 대통령은 알츠하이머 때문에 서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 전 대통령과 만나는 4번째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30분 남겨둔 브리핑자리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참모들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 대통령을 “서울에 방문했을 때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라 설명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그때야 비로소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전 대통령을 기억해냈다.
△두 명의 부시 대통령을 겪었는데
-둘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 부시는 ‘신사’였다. 대통령 중 최초로 한국의 통일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내에 있는 한국 동포들에게도 관심이 많아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국 교포들이 미국 내에서 영향력을 가지려면 정계에 진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노 대통령은 교포들의 잠재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교포사회에 대한 적절한 지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어땠나
-클린턴 대통령은 내가 겪은 대통령 중 가장 머리가 좋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로 끝을 내는 능력을 지녔다. 시작은 상대가 먼저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이나 결론은 항상 미국이 의도한 대로 이끌어냈다.
△부시-김대중 대통령의 회담은 어땠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후 그 다음은 북한의 차례란 소문이 무성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아야 했다. 김 대통령은 회담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설득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북한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었다. 설득에도 불구하고 별 확답을 얻지 못해 김 대통령이 무척 실망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시의 ‘Easy man'발언이 논란이 됐었다
-부시 대통령은 말을 시원시원하게 한다. 그의 말은 내용이 복잡하지 않고 직선적이며 표현이나 표정도 대담하다. 당시 부시 대통령의 ‘He's easy man to talk to'란 발언을 ‘그는 말하기 쉬운 상대다’라고 통역하고 보니 ‘아차!’ 싶더라. 사실 회담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 성향을 부채질한 전력이 있어 대화의 어려움을 예상했었다. 그 발언은 우려보다 노 대통령과의 대화가 잘 진행됐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도가 반영된 말이었지만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에서 ‘노 대통령은 대화하기 편안 상대’라고 재통역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언론은 ‘easy man'에만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써내 난리가 났었다. 그건 단지 그의 말하는 스타일일 뿐 노 대통령을 얕봐서 한 말이 아니었다.
△한-미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찬미’,‘북미’같은 단어에 얽매이지 말고 한국은 미국과 협력해 공동 이익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일부의 모습처럼 미국이 준 도움을 잊지 못해 미련을 갖지도 말고, 그렇다고 미워할 필요도 없다. 한편에선 미국을 이용하자는 말을 하는데 미국은 한국에 이용당할 정도로 어리석은 나라가 아니다. 어느 나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지만 공동의 이익을 찾아 지속적으로 협력을 늘려나가야 한다. 한국입장에서 공동 이익의 영역이 가장 넓은 나라가 미국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대화를 12시간 동안 통역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북한 측을 상대로 통역을 할 때 나는 평양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자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한다 든지, ‘사인한다’를 ‘수표한다’라고 고쳐서 말한다. 억양도 평양말로 한다. 들은 내용을 다시 상대방이 가장 편하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들어 전달해려 노력한다. 이런 측면에서 통역가도 ‘배우’란 생각이 든다.
△통역가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우선 통역을 하는 두 나라의 말에 능통해야 한다. 또한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대한 상당한 지식도 필요하다. 언어능력과 지식의 중요성이 100%중 각각 25%라면 그 나머지는 ‘자질’이다. 통역가는 노력을 넘어선 천부적인 재주가 있어야 한다. 노력으로는 어느 정도까진 성장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자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통역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날의 컨디션도 중요하다. 젊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그날의 컨디션이 중요하단 걸 느꼈다.
△49년간의 통역활동을 스스로 평가하자면
-사실 스스로를 점수로 평가하긴 힘들다. 다만 통역을 할 때 간혹 실수를 했다면 ‘아! 그런 실수가 있었구나’하고 깨닫는 것이지 ‘더 잘할 걸’하면서 후회해 본 적은 없다. 나는 통역일을 하면서 통역일을 하는 사람 중 나와 비슷한 수준인 사람이 있다면 통역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그것만은 자부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다음 학기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글을 계속 쓸 예정이다. 그리고 이미 시작한 회고록 집필도 계속 할 것이다. 국제대학원 강의도 계획 중이다. 나는 학부생들과 수업할 때 무척이나 즐겁다.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함께 내 경험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는 기회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