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번에 권영길이 될거라면서요?”
“누가 그래?”
“우리 반 아이들이요.”

대선 주자들의 첫 번째 TV합동토론이 있던 다음 날,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아들과의 대화내용을 전해주던 한 선배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유쾌하게 박장대소했다. 권영길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어도 이번 선거에서 권영길이 대통령으로 당선될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실제로 권영길은 개표결과 선거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보다 낮은 3.9%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6.13 지방선거와 이번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한나라당, 민주당이라는 두 거대정당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3정당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부유세 신설, 무상의료·무상교육 실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개정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워 다른 정당과의 차별성 긋기에 성공했다. 민주노동당의 슬로건인 ‘평등한 세상, 줏대있는 나라’는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이 보수적인 정치행태에 염증을 느껴오던 유권자들의 새로운 개혁정치에 대한 열망의 소산이라면,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분명 또 다른 작은 승리자이다.

혹자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 이유를 과거의 과격한 급진주의 이미지를 스스로 탈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부유세 신설, 무상교육·무상의료 실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는 다른 정당들의 정책과 비교해 볼 때 여전히 과격한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급진 과격세력의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는 유권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화끈하다” “속이 시원하다”로 집약된다. 무엇이 이토록 유권자들을 변화시켰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민주화의 힘 그 자체에 기인한다. 민주화 이후 반공보수적인 담론체계는 서서히 해체되어 왔다. 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갈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적 정치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이 시민사회 내에서 꾸준히 성장해 왔다. 민주화 이후 정치의식의 편차를 가르는 분획선은 세대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30대, 민주화 이후 새로운 유권자층으로 등장한 20대는 한국사회의 가장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새로운 정치지형을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하나는 김대중정부의 흔들림없는 대북 포용정책이다. 이는 美風, 核風, 전쟁위협 카드가 과거와 같이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친북·친공으로 동일시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정부가 구태의연한 기존정치를 답습한 데 따른 역설적 효과이다. 유권자들의 개혁열망과 현존 정당체제간의 괴리감이 확대·심화될수록 기존 정당체제 바깥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개혁적이고 보다 진보적인 정치에 대한 갈망 또한 증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가 유권자의 의식 변화를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거제도라는 변수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방송토론위원회는 전국선거에서 5%이상 득표한 정당 후보에게 세 차례의 TV합동토론 기회를 부여했다. 민주노동당은 6.13 지방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힘입어 8.1%의 득표로 제3당이 되었고, 그 결과 이 티켓을 따낼 수 있었다. 프랑스처럼 대통령 결선투표제가 있는 경우, 유권자들은 자신의 선호를 1차 투표에서 고스란히 표출할 수 있다. 2차 결선투표에서 정당들은 1차 투표 결과를 놓고 이념적·정책적 거리가 가까운 정당들끼리 연합을 통해 경쟁한다. 그러나 단 한번의 승부로 최다득표자의 당선이 확정되는 한국의 현행 대통령선거제도 하에서 유권자들은 사표 방지를 위해 전략적 투표를 하게 된다. 정몽준이 민주당과의 공조를 철회하기로 한 직후 권영길 지지에서 노무현 지지로 돌아선 표만 해도 약 2%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은 권영길 후보의 정책에 더 공감하지만 차선책으로 노무현에게 투표했다고 고해성사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여럿 보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는 2004년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을 꼭 찍겠노라고 고백한다.

유권자의 조용한 의식혁명이 진정한 선거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권미순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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