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으로 달려오는 그의 자전거
자전거 제작자 김두범 씨
‘두부’라는 별명을 가진 장인 두범 씨는 푸근한 인상과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청년이었다. 자신의 별명에 ‘工’(장인 공)을 붙여 수제 자전거 공방 ‘두부공’을 열었다. 홍익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두범 씨는 대학에 입학할 무렵엔 평범한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대학에 진학한 뒤 노동가치론을 공부하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노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배운 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농업, 카페, 목공, 자전거 등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산업을 고려했다. 그 결과 다른 것들보다 자전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농사를 하기엔 땅이 없고, 카페는 재미없을 거 같고, 목공은 분진 나는 게 싫었어요. 하지만 자전거는 싫은 이유를 찾지 못했고 오히려 끌렸어요”
인문학을 전공한 두범 씨가 기술자의 삶을 선택했을 때 주변의 만류도 많았다. 하지만 두범 씨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국바이크아카데미에 들어가 자전거 정비를 배웠고 국내의 유명한 자전거 장인의 제자로 있었다. 한 걸음 더 진전하기 위해 미국의 ‘UBI(United Bicycle Institute)’에서 체계적인 자전거 정비 및 산소용접, 전기용접, 프레임 제작 등을 배우고 귀국했다.
두범 씨는 자전거에 새로운 철학은 담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전거는 판매의 영역이었다. 자전거 가게는 좀 더 많이 팔고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고 소비자는 원하는 가격에 자전거를 구매하면 그만이었다. “자전거를 판매영역이 아니라 산업의 영역이라 생각해요. 제가 만든 물건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체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처음 공방을 차리려고 계획했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자전거를 진열하고 자전거를 제작할 공간이 필요했다. 2011년 3월 공방을 열 당시 두범 씨는 29살이었고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은행 대출과 그동안 논술강사 하면서 모았던 돈, 그리고 가족이 보태준 돈을 모두 모아 겨우 공방을 열 수 있었습니다”
공방 운영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가격을 정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자전거 한 대를 생산하면 보통 30%의 이윤을 생각하며 가격을 정한다. 하지만 소비자와 가격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두범 씨는 처음 말한 가격을 다 받은 적이 없다. “사실 돈을 벌기엔 자전거는 가치 있는 사업은 아닙니다. 전 자전거를 소통의 매체로 생각하기에 가격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두범 씨는 일반 자전거 판매점과는 다른 가격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두범 씨가 만들거나 고쳤던 자전거를 타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두범 씨 행복을 느낀다. “20대 여자 손님이었어요. 정비를 맡긴 손님이었는데 정비가 끝난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저한테 고맙다고 인사했을 때 정말 보람찼습니다”
두범 씨는 자전거를 만들면서 기존의 완성된 프레임을 쓰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자전거 몸체인 프레임을 연구하고 실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아직 공방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시간적․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다. 두범 씨는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전거에 관한 연구를 더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김두범 프레임’을 만들어 많은 자전거 제작자들이 제가 고안한 프레임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