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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
‘역사’하면 보통 삼국통일, 위화도 회군과 같이 많은 사람의 명운을 바꾼 사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큰 사건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기나 편지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개인적인 기록은 작고 평범한 삶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작은 역사를 ‘ 미시사(微視史)’라 한다.
역사는 어디에나 있다. 본교에도 다양한 역사가 쌓여 있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본교 곳곳에 숨어 있는 미시사를 조명했다.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이 다양하듯, 역사를 대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본교의 역사를 지키고, 이어가고, 만들어가는 이들을 만났다.
1. 훼손된 고서를 보존하다
본교 대학원 도서관에는 12만여 권의 고서가 보관돼 있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칙이 적힌 <교전일람(校典 一覽)>부터 국보 제291호인 <용감수경(龍龕手鏡)>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고서 전문 사서 한민섭 학술정보서비스부 차장을 만나 고서 복원 및 보관에 관해 들었다.
- 본교의 고서 관리 방식은
“고서는 주로 전문가의 배접을 통해 보존처리됩니다. 배접은 종이 뒷면에 얇은 한지를 새로 덧붙이는 작업인데, 물에 젖어 곰팡이가 스는 등 심하게 훼손된 책도 이 작업을 거치면 새롭게 생명력이 부여됩니다.”
-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이광수 작가의 <무정(無情)> 초판본이 기억에 남습니다. 출판 100주년 기념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특별전을 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당시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재판본을 전시했는데 본교 도서관이 기증받은 책 중 하나가 무정 초판본으로 확인돼 국립중앙도서관이 곤란해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공간을 모르고 졸업하는 학생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대학원 도서관이라고 부르니까 학부생은 못 들어오는 줄 아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한 번쯤은 본교의 고서와 문화재를 구경하러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도서관의 한적서고(漢籍書庫)를 찾았다. 서늘한 공기와 독특한 냄새가 기자들을 반겼다. 책 특유의 냄새인 줄 알았는데 고서 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분사되는 방충제와 항균제의 냄새였다. 기증자의 호(號)가 걸린 책장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귀중서고가 나타난다. 그 안에 보관된 <교전일람>을 펼쳐보니 휴학일이 일본 명절로 적혀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보성전문학교를 잠시 그려볼 수 있었다. 한민섭 차장은 “공동체적인 삶의 흔적이 곧 역사”며 “삶의 흔적이 쌓여 역사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2. 4·18 고려대 학생 의거를 기억하며
지난달 18일 4·18 의거 62주년을 기념한 4.18 구국대장정이 진행됐다. 2년간 중단됐던 구국대장정이 재개되며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번 구국대장정을 맞아 생활도서관은 ‘4·18 자료 도서 전시전 - 그날의 뜨거웠던 걸음들을 기억하며’ 전시를 준비했다. 생활도서관은 ‘읽고 소통하고 연대하는 생활도서관’이라는 기조 아래 도서관과 기록관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지난달 18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전시는 생활도서관에서 기획한 첫 자료 전시다. 전시를 기획한 운영위원 ‘량이’와 ‘로쉐’의 이야기를 들었다.
- 전시를 준비하며 느낀 점은
량이 | “4·18 의거 관련 자료를 보고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당시의 논의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생활 도서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생활도서관의 의미는
로쉐 | “누구나 와서 편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생활도서관이 민중도서관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람이 와서 책도 읽고 자료도 열람하며 다양한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3. 벽면을 장식한 우리의 추억
정문 앞 ‘카페 브레송’에 들어서면 양쪽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볼 수 있다. 연애사부터 취업 걱정까지, 손님들의 추억이 담긴 포스트잇이다. 가끔 아는 사람의 이름이 보이면 괜스레 반갑다.
카페 브레송 사장님 오병수(남·42) 씨는 “처음에는 벽의 더러운 부분을 가리자는 친구의 아이디어였는데 포스트잇이 점점 늘어나더니 이제는 저희 카페 고유의 문화가 된 것 같아 신기하다”며 “간간 이 읽어 보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고 말했다.
4. 사진으로 남긴 제2공학관
2017년 철거된 제2공학관. 건물은 사라졌지만, 자신만의 시선으로 제2공학관을 기억한 이가 있다. 김은솔(디자인조형학부 12학번) 교우는 단순히 제2공학관의 정보를 남기는 것이 아닌 사진 수첩이라는 색다른 방법으로 그곳의 기억을 남겼다. 모든 기억은 역사이고 기록으로 남겨질 가치가 있다는 그를 만났다.
김 교우는 하루동안 노벨광장에서 직접 만든 사진 수첩을 판매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제2공학관을 남기고자 하는 이유와 방법에 공감해 주고 그들 역시 각자만의 방법으로 제2공학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듯해 뿌듯하다”고 했다.
김 교우는 큰 역사에 묻힌 작은 역사의 소중함과 사소한 일상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 “개인적인 장소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저는 기록되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를 저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5. 고대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고려대야 진짜, 대박이다 얘, 생일이라고! 어머, 축하한다 얘’
‘고대생축’으로 지은 4행시가 고대앞사거리 인근 카페 ‘피카 커피’에 붙었다. 지난 4일과 5일, 실전마케팅학회 KUDOS는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고 이곳에서 청춘을 보낸 학생들의 추억을 기념하기 위해 생일 카페를 준비했다.
4행시를 구경할 수 있는 ‘호춘문예’ 외에도 본교생의 추억을 사진으로 인화한 ‘고대와의 메모호리’, 인증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스튜디호’ 이벤트가 진행됐다. 평소처럼 카페가 운영됐지만 다양한 체험활동과 학회에서 직접 제작한 생일 기념 굿즈가 방문객들을 기다렸다. 담당자 양지훈(문과대 사회19) 씨를 만났다.
- ‘고려대학교 생일 카페’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계기는
“2년 만에 대면 강의를 듣는 고대 학우들이 학교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을 것 같아 개교기념일에 맞춰 행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고려대학교라는 공간이 고대생 각자가 자신의 청춘을 보낸 의미 있는 곳인 만큼 학생들인 우리가 주체가 돼 생일을 축하해주고 그 안에서 함께 보낸 시간을 같이 기억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번 생일 카페를 준비하며 느낀 점은
“우리가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고려대라는 공간 안에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준비하면서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많은 분이 저희 생일 카페를 찾아주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대’에 대한 애정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강동우·문도경 기자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