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의서재] 장소에서 공간으로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몰골과 날카롭게 벼려진 투쟁적인 눈빛은 그가 정치범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반대편 침대에는 한 여자가 있다. 그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은 그를 남자로 본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남성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작품으로, 같은 감방을 쓰는 성소수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이 인간답게 취급받지 못하는 곳에서 지독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발렌틴은 낭만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느껴지는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를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자신의 신념인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영화의 줄거리를 따지고 분석한다. 몰리나는 자신은 정치에 관심 없으며, 영화를 영화로만 볼 뿐이라고 응수한다. 이렇듯 몰리나와 발렌틴은 매우 다른 인물이다. 멋진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싶다는 몰리나와는 달리 혁명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 수 없다는 발렌틴. 이 둘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받지 못하는 감방에서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이해하고 탐구하게 된다.
소설은 감방이라는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된 ‘장소’가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몰리나와 발렌틴, 성소수자와 정치범, 낭만과 현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세상이 맞닿아 서로의 세상을 물들였을 때, 가장 비참한 장소는 제일 안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 탈바꿈의 과정에서 몰리나와 발렌틴은 서로의 세상을 탐구해 몰리나의 대사처럼 ‘내’가 아닌 ‘네’가 된다. 고독과 단절이란 단어가 못 박힌 장소를 공간으로 바꾸고 그 빈자리에 안전과 온기, 안온함을 채운다.
두 인물의 충돌과 이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 각자 다른 세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그 세계 간의 충돌을 경험한다. 그러나 몰리나와 발렌틴이 각 세상의 충돌을 만남으로 수렴한 것처럼 그 충돌에는 화합의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 가능성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장소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권유빈(문과대 철학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