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 대학의 학문적 역할 유지하려면
4년제 인문계열 학과 155개 폐지
디지털 인문학·융합전공 등장해
“인문학과 통폐합은 근시안적 행위”
“덕성여대 독어독문학과·불어불문학과 신입생 미배정은 학칙에 없고, 구성원의 의견을 무시한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인 결정이다.” 지난달 22일 덕성여대는 독·불문과 신입생 미배정, 259명 규모의 자유전공학부 신설 등이 담긴 학칙 개정안을 의결했다. 곽정연(덕성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평의원 중 한 분은 ‘대학평의회의부결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삼차 동일 안을 상정하고 평의원에 대한 지속 압박을 통해 끝내 통과시킨 것은 대학 민주주의를 유린한 처사’라는 입장을 밝히고 사퇴했다”고 전했다.
인문학과 통폐합은 덕성여대만의 일이 아니다. 2012년 962개였던 전국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는 2021년 155개가 줄어 807개가 됐으나 같은 기간 공학계열 학과는 1333개에서 1446개로 113개 증가했다.
수요 줄어들며 자리 좁아져
취업률 등 정량적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며 대학 사회에서는 인문학 관련 학과 폐지 및 통합, 인문학 필수 교양 과목 폐강 등이 일어나고 있다. 강득구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서울 소재 대학 학과 통폐합 현황’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 서울 소재 대학에서 인문사회계열 학과 17개가 폐지됐고 공학계열 학과는 23개가 신설됐다. 명지전문대와 통폐합을 추진하는 명지대는 2025학년도 철학과·물리학과·수학과·바둑학과 폐지를 결정했다.
지역 대학의 경우는 더 심하다. 2022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공시에 따르면 10년간 충청권 내 재학생 5000명 이상 일반대학 24곳 중 폐과 명단에 오른 순수학문 분야는 218개였다. 160여개 학과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53개 학과는 타 학과와의 통합을 통해 축소됐다. 원광대 철학과는 2021년 3월 폐지를 결정했다. 경남대 철학과는 2014년부터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았으며 2021년 8월 마지막 졸업생이 졸업했다. 대진대 철학과는 2016년 철학과와 사학과가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통폐합됐다.
학과 운영뿐만이 아니다. 대학 내 소프트웨어 관련 과목이 글쓰기 등 인문계열 강의를 대체하는 추세다. 본교는 올해 기존 6학점이던 교양 필수 과목 ‘자유정의진리’를 ‘학문세계의탐구’ 3학점으로 줄이고 핵심 교양은 폐지했다. 곽영윤(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2학기 ‘학문세계의탐구Ⅱ’는 교양 선택으로 변경돼 학생들이 얼마나 선택할지는 미지수”라며 “해당 강의를 맡아왔던 기존 교강사님들은 난감해한다”고 토로했다. 인문학 교양이 축소되고 그 자리에 ‘SW프로그래밍의기초’, ‘데이터과학과인공지능’ 총 6학점 강의와 ‘생명과학의세계’ 강의가 들어섰다. 최보경(교양교육원) 강사는 “대학이 시대 발전과 함께 요구되는 측면을 수용해야 하기에 관련 교과목은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이러한 과목을 추가하며 인문학의 자리를 좁히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곽영윤 교수는 “‘자유정의진리’는 염재호 전 총장이 인문학을 활성화해 보겠다는 취지로 도입하는 등 대학은 총장의 교육 철학에 따라 커리큘럼이 바뀐다”며 “현 운영진이 경제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며 인문 교양이 축소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수강생 미달로 인문학 강의가 폐강되는 경우도 잦다. 2024학년도 1학기 철학과 폐강 과목은 11개로 전체 학과 중 가장 많았다. 최보경 강사는 “최근 본교에서 동양 철학 관련 강의가 2학기 연속 폐강됐다”며 “대학은 소수 인문학 지원자를 위한 수강 인원 재조정 등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학기 '서양문화의전통과유산’강의를 들으려 했던 문과대 22학번 A씨는 “강의실도 배정됐고 교수와 듣고 싶다는 학생도 있는데 10명을 못 채웠다는 이유로 폐강되니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경쟁사회에서 뒤처지는 인문학과
인문학 위기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으나 최근 그 양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고정 관념이나 취업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된 상황으로 분석된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2019년 졸업생 기준 서울 주요 15개 대학의 인문계열 취업률은 64.6%다. 공학계열 취업률이 77.7%인 것과 비교된다.
대학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며 인문학 영역은 더욱 좁아진다. 교육부는 2016년 사회와 산업 수요에 맞춰 정원을 조정하는 대학에 자금을 지원하는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프라임’ 사업을 추진했다.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인 숙명여대는 2017년 전자공학전공, 소프트웨어융합전공 등 4개 프라임 관련 학과를 신설하고 인문계열 158명과 예체능계열 33명을 감축해 이공계열로 이전한 바 있다. 이어 2022년 7월에는 반도체 인재 양성 방안 발표와 2024학년도 일반대학 첨단·보건의료 분야 정원 조정이 확정되며 반도체·첨단분야에서 1829명 증원됐다.
무전공입학 확대로 이러한 흐름이 더욱 거세졌다. 학과·학부 구분 없이 대학 입학한 학생들은 실용 학문 위주로 선택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김장환 연세대 문과대학장은 “대학 입학 시에는 인문학을 전공으로 택하더라도 복수전공, 편입, 전과 등을 통해 실용 학문 분야로 전환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도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게 한다”고 말했다.
융합전공·디지털 인문학 대안으로 제시
인문학 혁신의 대안 중 하나로 디지털 인문학과 융합전공이 제시된다. 우동현(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인문학 작동 방식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인문학과 같은 융합적 접근을 추진하면 긍정적 면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교도 융합의 일환으로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숙명여대, 영남대 등 5개 대학이 참여해 문과대 중심으로 인공지능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보자는 취지다. 사업의 일환인 ‘인문사회 디지털 융합전공’은 작년 신설됐다. 이승은(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기술에 대한 이해를 접목해 현실 사회에서 인문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려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김성환(대진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융합이 대세”라며 “인문학 학생과 연구자는 이공계 중 제2전공분야가 있어야 잘 먹고 잘 사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최보경 강사는 “융합학문을 지원하기 위한 융합 연구소 설립 및 지원과 포럼 개최 등을 통해 인문학 연구자도 기술 개발적 속도에서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문학계는 디지털을 활용해 인문학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임대근(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분과 학문으로 접근하는 기존 체계로는 새로운 해답을 찾기 어려워졌다”며 “기존 체계를 벗어나 융합 학문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발맞춰 한국외대는 융합인재대학과 AI융합대학 등 융합 전공을 신설했다. 이정(한국외대 GBT학부) 교수는 “AI의 등장이 인문학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 인문학이 AI를 도구 삼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김장환 연세대 문과대학장은 “텍스트 마이닝, 디지털 아카이빙, 가상현실, 네트워크 분석 등 디지털 기술은 인문학을 풍부하게 하는 도구”라며 “탄탄한 인문학적 바탕에 첨단 기술을 적용할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내다봤다. 디지털 인문학이 전통적인 철학·사학·문학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전봉관(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인문학으로 그동안 해결할 수 없었던 난제를 디지털을 통한 새로운 방법적 해답을 줄 수 있는 것뿐 인문학의 대책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디지털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권영우 철학과 학과장은 “디지털인문학은 지식을 공유하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방법론일 뿐이지 새로운 이론이 아니다”며 “디지털 인문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가 없어 연구자, 연구 분야가 없는데 학부에서는 계속 뭔가를 가르치고, 교육부는 인문학의 위기니 혁신하라 주문한다”고 비판했다.
교수들은 당장의 쓸모에 집중하느라 장기적 시야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승은 교수는 “고등 교육 기관에서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줄 수 있는 전공 수업은 당연히 필요하다”면서 “양적 기반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하기에 무작정 사회 수요가 없으니 줄이라는 것은 근시안적인 행위”라며 현 대학 흐름을 지적했다. 차지영(덕성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는 “인문학은 단지 대학에서 학문적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학생들의 가치판단 척도이기에 학문의 지성인 대학에서 인문학의 명맥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글 | 하수민 기자 soomin@
인포그래픽 | 전장원 기자 newj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