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원래 그랬다”
'냉전'(冷箭)은 숨어서 쏘는 화살이란 뜻으로 고대신문 동인이 씁니다.
파리 올림픽이 끝난 지 벌써 한 달. 22세 배드민턴 선수 안세영이 던진 메시지가 아직도 여운을 남긴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7년 내내 국가대표팀 빨래와 청소 등 잡일을 도맡았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그토록 꿈꾸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고발한 현실이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더 충격적이었다. 악습을 깨기 위해 불이익을 감수한 안세영의 용기는 인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의 벽이 너무 높은 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 배드민턴 레전드는 “대표팀엔 누가 등 떠밀어 들어갔느냐”고 비판했고, 대한체육회장은 안세영의 표현 방법이 서툴렀다며 책임 소재를 돌렸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안세영의 철없는 투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참담한 현실을 보니, 오랜 시간 그가 겪었을 고충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세계랭킹 1위 안세영이 이 정도 대우를 받는다면 그 뒤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선수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연 배드민턴계만의 문제일까.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구시대적 관행은 대물림되고 있다. 그사이 부당한 일에도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섣불리 맞서거나 저항하면 부적응자로 낙인찍힐 뿐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학습한 결과다.
최근 재조명된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시 밀양 주민들과 지역사회는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며 조용히 사건을 묻었다. 너무 오래전 일인가? 본교 럭비부 선수가 전지훈련 도중 열사병 증세로 쓰러져 사망한 것이 불과 지난달이다. 당시 코치진은 엄살이라며 별다른 조치 없이 선수를 방치했다고 한다. 한 코치는 이미 작년에 가혹행위로 징계를 받았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어려운 강압적 분위기가 그려진다. 결국 모두 한국 사회의 구조적 결함이 낳은 비극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각기 다른 시대의 사회적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적 현상을 일컫는다. 이를 빌리자면 2024년 파리 올림픽은 개성 넘치는 Z세대 선수들의 활약과 오랜 세월의 부조리가 공존한 대회였다. 이제 올림픽 성화는 꺼졌지만, 안세영이 일으킨 변화의 불씨까지 꺼뜨려서는 안 된다. ‘원래 그랬다’, ‘시간이 필요하다’ 따위의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처럼 숨 막히는 사회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청년들의 절박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안세영의 용기가 현실의 벽에 막혀 이대로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낫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