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 1년, “이 나라선 과학 못 해”

2024-11-18     윤태욱 사회부장

고려대 국가연구비 20% 줄어

애꿎은 소형과제만 피해

예산 되돌려도 회복엔 5년 필요

 

  올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은 지난해 대비 16.6% 삭감된 채 집행됐다. 1964년 정부 연구개발예산 통계를 수집한 이후 처음이다. 해당 예산 감축의 폐해는 고스란히 과학계에 돌아갔다. 이공계열 A 연구교수는 “이탈한 연구자들로 인한 과학계의 피해를 모두 회복하는 데엔 최대 6~7년까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연구비를 나눠먹는 ‘카르텔’ 타파를 위해 예산을 삭감했다고 설명했지만, 고려대 교수들은 엉뚱한 해결책이라며 입을 모았다.

 

  예산 삭감 이후 고려대 연구 ‘휘청’ 

  지난해 대비 16.6% 삭감된 과학기술 R&D 분야 예산으로 인해 과학계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고려대도 마찬가지다. 올해 고려대 국고보조금수입은 지난해보다 64억9094만 원 적은 781억6892만 원에 그쳤다. 비등록금회계 연구비 지출 역시 지난해 대비 15%가 줄어든 238억100만 원이다. 올해 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지난해 이전 선정돼 연구가 진행 중이던 계속과제에 대해 연구비 10~20% 일괄 삭감을 통보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1만1958개의 계속과제가 감액·중단됐다. 1조2062억4200만 원의 연구비가 감액됐고, 중단된 계속과제에 투입됐던 429억4500만 원은 매몰 비용으로 전락했다. 과기정통부가 지원하는 개인연구 신규과제 역시 지난해(3886개) 대비 15.1% 줄었다.

  고려대 연구진도 R&D 분야 예산 삭감 이후 기존 진행과제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공계열 B 연구교수는 “개인과제 연구비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22%가 삭감됐다”며 “활동비 대부분을 줄여 연구에 지장이 컸다”고 전했다. 김정민(건강기능식품연구센터) 연구교수는 “중간평가 평가위원으로 활동하니 3년 목표 수행 과제에 대해 2년 차부터 일괄적으로 예산의 60% 이상을 삭감하게 됐다”며 “예산 80%까지도 삭감해 연구 지속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열 C 교수도 “5년 목표 과제를 3년 정도 수행하고 지난해 중간평가를 받았는데 예산 삭감 이후 과제 지원금도 줄어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신규과제를 지원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B 연구교수는 “비전임 연구원들은 대부분 소액과제인 기본 연구, 학문균형발전지원 과제 등을 통해 인건비를 받았지만, 올해 전례 없이 수천 개의 소액과제 신규지원이 사라지며 많은 비전임 연구원이 실직했다”고 전했다. 김정민 연구교수도 “주변 교수님들로부터 신규 국책 연구과제의 공고 상당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며 “대학원생 인건비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피해를 본 사례도 속출한다. 이공계열 D 박사후연구원은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연구과제의 많은 부분을 국가 지원에 의존한다”며 “최근 1년 동안 과거엔 선정됐을 법한 연구제안서들이 번번이 탈락했다”고 전했다. A 연구교수는 “향후 5년의 연구과제를 준비했지만, R&D 분야 예산 삭감 후 무산됐다”며 “올해까진 연구비를 받아서 학교에 있지만 내년은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전임교원이 아닌 연구교수·박사후연구원·대학원생에겐 예산 삭감이 생계 위협으로 다가온다. 임금을 받는 전임교원과 달리 비전임 연구원들은 국책 연구과제를 맡으며 연구비로 인건비를 충당하기 때문이다. 정희석(기초과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과제 예산이 20% 이상 일괄 삭감됐다”며 “연구 예산의 감소는 그대로 연구진의 인건비에 반영됐다”고 했다. D 박사후연구원도 “대학원생 인건비가 0원인 연구실도 있다”며 “R&D 분야 예산 삭감으로 대학원생들은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연구비가 지급되는 계속·신규과제를 얻지 못하면 비전임 연구원들은 학교를 떠나야 한다. 이에 고려대 연구 인력의 해외·기업 유출이 우려된다. 이공계열 E 강사는 “주변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R&D 분야 예산 삭감 후 해외로 떠났다”고 전했다. A 연구교수도 “R&D 분야 예산 삭감 이후 중국계 연구소에서 지원 제안 메일이 온다”며 “국내보다 인건비도 높아 생계를 위해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젊은 연구원 유입을 막기도 한다. 의학과 19학번 F씨는 “기초의학 연구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며 “공과대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던 지인도 예산 삭감 후 사기업 취업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전했다. A 연구교수도 “올해 예산은 과학자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며 “후배들에게 연구가 재밌다는 이유로 대학원 진학을 권유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고려대 R&D센터엔 KU-KIST 융합연구원, 오정리질리언스연구원 등 연구소와 크림슨 창업지원단이 입주해 있다.

 

  카르텔 잡는다던 정부, 역효과 불러와

  정부는 올해 과학기술 R&D 분야 예산을 삭감한 이유로 비효율적 연구비 지출과 낡은 관행을 꼽았다. 지난해 6월 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예정돼 있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에선 윤 대통령의 ‘카르텔 발언’으로 인해 과학기술 R&D 분야 예산안이 전면 백지화됐다. 이에  E 강사는 “모든 분야가 그렇듯 과학계도 예산 낭비가 존재하지만, 행정적 제도개선이 필요한 것이지 예산을 삭감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김정민 연구교수도 “관행 개선은 제도를 바꿔야 할 일이지 예산을 줄인다고 해결되진 않는다”며 “정부에서 R&D 분야의 예산 삭감을 결정한 후 핑계를 사후적으로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일괄적 예산 삭감이 오히려 과학계 악습을 강화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A 연구교수는 “카르텔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연구비를 10억 원 이상씩 받는 대형 과제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D 박사후연구원도 “R&D 분야 예산 삭감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계 폐단과 가장 거리가 멀던 대학원생들과 신진연구인력”이라며 “관행적 악습은 당연히 개선돼야 하지만 예산 삭감으론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B 연구교수도 “연구계의 낡은 관행은 주로 몰아주기식 대형 과제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며 “현 정부는 대형 과제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를 완화하고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운 소형 과제들만 없앤다”고 전했다. 실제로 연평균 연구비 5억 원 이상의 대형 과제로 분류되는 집단연구 신규과제 수는 지난해 대비 17.2% 증가했다. 반면 개인 단위의 기초과학연구자와 신진연구자의 연구 기회 확대를 위한 1억 원 미만의 생애기본연구 신규과제는 지난해 3972건에서 전면 폐지됐다.

 

  예산 원복에도 … “진짜 문제는 내년”

  정부는 내년 과학기술 R&D 분야 예산으로 올해 대비 14.6% 증가한 29조7000억 원을 발표했다. 지난 6월 27일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재정 여력이 정말 없는 데도 최선을 다해 큰 폭으로 증액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과학계에선 올해 예산 삭감으로 인한 여파가 한 해 액수가 늘어난다고 회복될 수준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D 박사후연구원은 “예산을 원복하더라도 떠난 연구원들과 대학원생들이 돌아오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희석 연구교수는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경력이 단절되고 이들이 학계를 떠나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상실한 인적 자원을 복원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지원 대상과 정책 기조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도 거세다. B 연구교수는 “비전임 연구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구과제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며 “내년에도 기본연구와 학문균형발전지원 과제는 여전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희석 연구교수도 “전체 액수는 복원됐으나 소형 과제에서 빼앗은 예산을 대형 과제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며 “오히려 올해 폐지된 연구사업이 내년에도 개설되지 않으며 예산 삭감의 여파는 더욱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과기정통부가 발표한 ‘2025년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초연구사업 1차 신규과제 공모’에서도 지난해를 끝으로 폐지된 생애첫연구와 기본연구는 회복되지 않았다. 박사후연구원 등 젊은 과학자 대상 세종과학펠로우십도 올해의 절반 이하인 250개의 신규과제를 내년 목표로 잡고 있다. E 강사는 “지원 가능한 신규 과제가 줄어 세종과학펠로우십 지원율이 지난해 두 배를 넘었다”며 “탈락한 2000명 이상의 연구진들이 다시 경쟁할 수 있도록 세종과학펠로우십 지원을 늘려야 하는데, 현 정부가 R&D에 대한 철학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고 전했다. C 교수도 “예산 증액은 다행이지만 지원 대상을 결정하는 정부의 철학이 더욱 중요하다”며 “글로벌 연구과제에 중점을 두는 등의 내년 지원 방향은 과학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교수들은 지속 가능한 연구를 위해 안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B 연구교수는 “행정 편의주의와 실적 우선주의는 기초과학이 발전하기 어렵게 만든다”며 “지속적 연구 지원으로 기초과학 과제들이 최소 10년 이상 지원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D 박사후연구원도 “분야마다 장기적으로 연구돼야 할 주제가 존재하는데, 가장 긴 연구과제가 5년 수준인 지금의 환경에선 엄두조차 낼 수 없다”며 “한번 시작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분야에 고르게 지원할 필요성도 제시된다. 정희석 연구교수는 “과학 발전을 선도하는 선진국들은 대개 연구비가 풍족하지는 않아도 폭넓은 분야에 꾸준한 투자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C 교수도 “다양성이 사라지면 생태계가 위협받듯 과학 투자도 중도를 지켜야 한다”며 “노벨상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닌 기초·응용학문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전했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선 김형숙(한양대 데이터사이언스학부) 교수에 대한 채용 비리 논란이 불거졌다. 올해 6월 169억 원 규모의 R&D 사업에 관련 연구 실적이 없는 무용 전문가 김 교수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B 연구교수는 “이공계 학문을 오랜 기간 연구한 과학자들의 연구과제 수천 개를 없애고 무용 전공자에게 수백억 원을 지원하는 것이 현 정부의 ‘공정과 상식’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A 연구교수도 “내년 복원되는 예산도 이와 같이 엉뚱한 곳으로 투자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R&D 분야 예산을 삭감한 4개월 뒤인 지난 2월 8일 윤석열 대통령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글|윤태욱 사회부장 yoonvely@

사진|김준희 기자 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