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의 서재] 잊기 좋은 이름을 부르는 일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이 있다면 슬플 것이다. ‘잊기 좋다’는 말에 이름은 제 역할을 뺏긴다. 산문집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이 심란해졌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김애란이 부른 수많은 이름 중에 정말 잊을 만한 이름이 있다는 것인가.
‘맛나당’은 김애란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로, 김애란에게는 꿈과 이야기의 장소다. 그 시절을 관통하는 어머니의 취향과 의지는 김애란을 키운 ‘팔 할’이 되었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나를 키운 팔 할은’ 속 이 구절이 나를 이 책에 닿게 했다. 김애란의 어머니는 생존만을 바라 맛나당을 운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영리하고 반짝이는 것들로 자신의 삶을 가꾸었고, 생존과 정반대에 놓인 허영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결정적 순간 김애란을 붙들었다. 삶에는 살아내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김애란은 어머니를 통해 확인한다.
나아가 김애란은 ‘나’를 통해 나의 ‘밖’을 짚어낸다. ‘말주변에서 말주변 찾기’에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중요한 질문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듯. 김애란은 이 시대에 필요한 말들을 잊지 않고 쓴다.
그는 ‘나보다 앳된 친구들’에게 ‘이건 아무나 가져도 되는 여름’이라며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여기’에선 앳된 당신에게 대가 없는 여름을 건넨다. ‘한여름 밤의 라디오’에서는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의’ 안녕을 묻기도 한다.
여름을 가지라는 당부와 명분을 받치고 있는 이들의 안녕을 묻는 말은 꼭 같은 말처럼 들린다. 새 여름을 가질 수 없었던 앳된 얼굴들과 썩어 문드러진 여름을 견디고 있는 어른들은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고 제대로 호명하려 하는 김애란의 글은 말할 수 없이 애틋하다. 나 사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때로는 나의 밖을 생각해 보는 글쓰기, 어쩌면 이것이 그가 ‘맛나당’에서 밟고 자란 온갖 반짝거리는 것들의 결과물은 아닐까.
그는 ‘이해’란 ‘타인의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타인의 다름을 실감하기보다 잊어가며 ‘이해’를 미뤄왔다.
‘세상에 잊어야 한다거나 잊어도 되는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잊기 좋은 이름> 속 선언에 가까운 김애란의 문장 앞에서 나는 부끄럽고도 서글퍼진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국 기억하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이었음을, 그러나 우리는 게으른 마음으로 잊어 왔음을 실감한다.
이 책을 통해 수많은 오해와 이해가 부딪히는 삶 속에서 우리 안에 무엇이 스며들었는지, 나의 안과 밖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잊는 것보다는 기억하는 게 좋고,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늘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양서연(문과대 철학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