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이보그 서사의 통찰, 편견 넘어 일상 되다
한국 SF 작가·평론가 좌담회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
“사이보그, 공포에서 일상으로”
기술과 함께 진화하는 서사
SF 장르에서 사이보그는 단골 소재다. 기술이 발전하며 SF 속 사이보그의 모습이 점차 현실화돼가는 지금, SF 작가 김준범, 남유하, 이산화와 평론가 박상준, 심완선을 만나 21세기 사이보그 서사의 의미를 짚어봤다.
- 사이보그 서사의 가장 큰 매력은
이산화 | “인체를 변형하고 해체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요. 사이보그 서사는 인간의 몸으론 할 수 없지만 사이보그는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상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상상을 얼마나 과감하게 밀고 나가느냐에 따라 서사의 매력이 결정되죠. 장민 작가의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는 우주에서 생활하기에 너무 나약하단 걸 깨달은 인류가 거대한 강화 로봇 슈트를 신체에 계속 덧붙이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틀을 깨부수는 SF 설정이 좋은 예시라고 봅니다.”
심완선 | “자기 신체와 인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봅니다. 찰스 스트로스의 소설 <유리 감옥>은 신체를 마음대로 만들고 백업한 기억으로 부활할 수 있는 사회를 다룹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실존적 자유를 찾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남유하 | “사이보그 기술이 인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이전엔 단순 모형 의수를 쓰던 사람도 이제는 사이보그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시각 장애인도 뇌에 신경 회로를 연결하면 앞을 볼 수 있게 되잖아요. <우리 할머니는 사이보그>에선 할머니가 손녀를 지키다 사고를 당하게 되지만, 사이보그 기술 덕분에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 사이보그 고유의 결핍이 있다면
박상준 | “인간성을 잃어버린다는 두려움과 다시는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상실감입니다. 문신한 사람이 원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요. 미래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사이보그 시술을 받게 될 수 있는데 그중에는 후회하는 이들도 있겠죠. 이젠 SF에서 이런 정신적 고뇌가 주로 다뤄질 것 같습니다.”
김준범 | “사이보그의 고통을 찾는 건 90년대의 고민입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주목받던 시대에는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존재의 의의를 고민하는 것이죠. 사이보그가 됨으로써 완벽해진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무엇인가’ 등 철학적 고뇌밖에 남지 않아요. 오히려 툭하면 병에 걸리는 몸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겠죠.”
이산화 | “저는 사이보그 캐릭터의 결핍을 잘 다루지 않는 편입니다. 의족이나 의수를 달았다고 해서 인간성이 훼손된다고 느끼지는 않아요. 사이보그가 되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인간에서 멀어지는 건 아닙니다. 로봇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죠.”
-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사이보그의 정체성은
박상준 | “기계의 비율이 49%일 때까지는 인간이고, 51%부터는 기계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건 이상합니다. 조금이라도 사람의 몸이 남아있다면 인간으로 봐야 하죠. 하지만 인공 뇌신경 세포 기술이 발전해 절제된 부분을 인공 뇌신경 세포로 채울 수 있게 된다면 정체성 문제는 더욱 복잡해질 겁니다. 결국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변모해 나감에 따라 인간성의 범주를 지속적으로 확장해야겠죠.”
이산화 | “인간과 기계가 상호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기계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도 있죠. 요즘 정체성 담론의 경향처럼 자기 선언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끼면 인간인 거죠. 국가 개념이 원래부터 정해진 게 아니듯 인간과 기계의 구분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기계가 함유되지 않은 부분에만 인간성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존재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으로 불리는 데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심완선 |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사이보그의 정체성을 구분한다면 스펙트럼으로 봐야 해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은 존재의 스펙트럼에서 기계와 인간을 이분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인지 아닌지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죠. 예를 들어 누군가 화재 사고로 신체 대부분이 기계로 대체됐을 때 그를 어떤 존재로 볼지 함부로 기준을 세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요.”
- 사이보그는 주로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남유하 |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죠. 사람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막연히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옛날엔 사이보그가 <로보캅>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소설 속 사이보그는 오히려 소수자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박상준 | “인간성을 잃을 수 있다는 혼란 때문입니다. 인간의 따뜻한 감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차갑고 딱딱한 기계적 감성이 정신을 지배하는 듯한 변화를 겪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두려움을 자아내죠. <스파이더맨 2>의 닥터 옥토퍼스처럼 기계가 인간의 뇌를 지배하게 되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이산화 | “우리는 사이보그가 우리와 비슷하지만 결국 다른 존재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게 돼요. 늑대보다 늑대인간을 더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에 대한 배타적 공포 심리가 작용하는 거죠. 중국인보다 조선족을, 반대 성별보다 트랜스젠더를 더 무서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비이성적 공포예요.”
- 사이보그 서사 속 문제의식은
남유하 | “의료 복지 기술의 상업화와 기술 접근성 격차로 인한 불평등 문제가 주요 이슈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모두가 사이보그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현재도 사이보그 기술이 필요한 사람이 정작 비용 문제로 기술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멸종위기인>에선 인류의 90% 이상이 안드로이드 몸에 기억을 이식해 신인류가 되고, 나머지 구 인류는 멸종 단계에 이르러 섬에 갇혀 사는 계급 사회가 나타납니다. 부자는 벤츠를 타고 빈자는 중고차를 타는 현실과 비슷한 거죠.”
이산화 | “사이보그 자체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기보단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서사적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버펑크 장르 특성상 자본주의 비판, 빈부 격차, 사회적 차별 등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사이보그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반영할 수 있죠.”
심완선 | “기술 발전 속도에 비해 규율할 법과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빚어지는 혼란이 많이 다뤄지 고 있습니다. 가령 제도상 보증인 2명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 명은 간병 로봇이고 다른 한 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라면 어떻게 될까요? 이처럼 사이보그 기술과 권리를 둘러싼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포용적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사이보그 서사의 주된 문제의식입니다.”
- 현재 사이보그 서사는 어떻게 달라졌나
남유하 | “과거엔 <600만 불의 사나이>와 같이 사고로 인한 결함을 기계로 보강해 초인이 되는 이야기가 나왔다면, 이제는 사이보그와 공존하는 사회를 그리는 쪽으로 변화했습니다. 물론 디스토피아로 이어지는 서사도 있겠지만, 저는 사이보그를 긍정적인 미래를 이끌기 위한 도구로 그리는 것 같아요. <뇌 엄마> 속 주인공 아이는 유리관에 둥둥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엄마를 위해 기술이 개발되기만을 기다립니다. 사이보그 기술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로 그려지는 거죠.”
박상준 | “20세기에는 사이보그가 유니크한 존재로 나타난 반면, 21세기엔 일상적 존재로 그려지게 됐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집단을 이루거나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등 다양한 가능성이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실제로 손가락 사이에 칩을 이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사이보그 기술이 일상화되는 것처럼, 서사 속에서도 사이보그가 영웅으로 등장하는 대신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겁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사이보그 서사가 함께 변화하고 있는 거죠.”
김준범 | “초기에는 인간이 사이보그를 지배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마치 백인들이 흑인들을 대했던 것처럼 사이보그를 노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죠. <웨스트월드>, <기계전사 109>와 같은 20세기 사이보그 서사에서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주로 다뤘지만, 21세기에는 <공각기동대>처럼 사이보그 캐릭터가 자기 존재 이유를 찾는 여정이 주된 내용이 됐습니다. 존재에 대한 담론이 주를 이루게 됐죠.”
- 미래의 사이보그 서사는
김준범 | “앞으로의 사이보그 서사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존재들을 탐구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이 과정에서 영혼과 육체, 우주의 근원에 대한 종교적·철학적 담론이 사이보그 서사와 결합하며 더욱 심오해질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 환생이란 종교적 개념이 사이보그 서사에선 옷 갈아입듯 뇌나 기억을 제외한 몸을 바꾸는 형태로 많이 다뤄지고 있어요.”
박상준 | “단순한 인간·기계 결합을 넘어서서, 인간 개체의 한계 자체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적 상상력이 사이보그 서사에 반영될 것으로 보입니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포스트휴먼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이보그 존재 다변화에 수반되는 복잡한 정체성 문제도 미래 사이보그 서사의 핵심 화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이보그가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 지금보다 더 많이 그려질 거예요.”
이산화 |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성에 대한 고뇌는 이미 너무 많은 작가가 다뤄온 진부한 주제가 됐어요. SF는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도하는 장르가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장르입니다. 사이보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하나의 소재로서 작품 안에서 다룰 수 있는 상상력을 과감히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이버펑크: ‘cybernetics’와 ‘punk’의 합성어. 기계화된 세상과 암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SF 문학 장르다.
글 | 김민서 기자 adriana@
사진 | 안효빈·최주혜 기자 press@
이미지출처 | 영화 <로보캅> 공식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