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브랜드 로고 안에 세계를 주입하다

최장순(언어학과 98학번) LMNT 대표 인터뷰

2025-03-09     백하빈 기자

기호학·철학 원서 읽고 토론

이유 있는 브랜딩 추구

“언어가 곧 세계 반영”

 

최장순 대표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려 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를 인정하는 브랜딩을 한다면 사람을 위한 기획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했다.

 

  최장순(언어학과 98학번) LMNT(엘레멘트컴퍼니) 대표는 이름과 로고부터 사업장, 웹사이트까지 소비자와 만나는 모든 곳에 브랜드를 녹여내는 브랜딩 기획자다. 그가 처음 기획자가 됐을 때 브랜딩은 이름과 디자인의 성형에 불과했지만, 최장순 대표는 기업의 잠재 역량을 분석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를 시각화하면서 브랜딩의 새 길을 열었다. 구찌, 삼성,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기업의 브랜딩을 맡았던 최장순 대표는 고객사가 사업의 영역을 진화시켜 공동체와 어우러지도록 브랜드를 기획하는 것이 목표다. 

 

  독특한 브랜딩 원천은 기호학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던 최장순 대표는 국민학교 4학년 무렵 부모님의 사업이 기울며 극심한 가난을 겪기 시작했다. “집에는 사채업자가 찾아왔고 지하실로 이사도 갔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어려워진 환경에 분노가 치밀어 창문 유리를 주먹으로 쳤는데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죠.” 방황하던 최 대표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공부였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공부하던 최 대표가 언어학과에 지원한 동기는 구약성경 속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따라 교회를 다녔는데, 홍수를 일으키고 도시를 불태우는 구약성경 속 신의 모습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어요. 번역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고대어인 원어로 성경을 읽어보고 싶었죠.” 

  고려대 언어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김성도(문과대 언어학과) 교수에게 배운 기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세계적인 석학이시라 학부 2학년 때 김성도 교수님 수업을 거의 다 수강했어요. 매 학기 수업을 듣던 저를 알아보시곤 기호학 전공 대학원 수업에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매주 영어 원서 한 권과 독일어, 불어로 된 유인물을 읽어야 했기에 따라가기 벅찼지만 교수님께 선택받았다는 뿌듯함과 기호학에 대한 애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수강했습니다.” 그는 기호학 덕분에 독특하고 의미 있는 브랜딩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기호학은 눈에 보이는 표현 이면의 의미를 찾는 학문이에요. 반대로 표현 이면에 의미를 숨기는 방법도 고민할 수 있죠. 어떤 의미가 숨겨졌는지, 어떤 의미를 숨길지 고민하다 보니 브랜드의 다양한 역량을 함축적으로 담을 수 있게 됐어요.” 

  최장순 대표는 인문고전강독반이라는 학회에 들어가 여러 분야 고전을 탐독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역)>와 뒤르켐의 <사회학적 방법론의 규칙들> 등을 읽고 토론했어요. 한 단원을 읽을 때마다 네 시간씩 토론하느라 책 한 권을 몇 달 동안 읽었죠. 술자리에서도 토론 내용을 메모한 뒤 다음 날 도서관에 가서 그 내용을 검색해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차별화로

  아르바이트할 시간을 줄여서까지 기호학과 고전을 깊이 공부하던 최장순 대표는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입대를 결심했다. 공군 부사관 출신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공군 장교가 됐지만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최 대표는 빚을 갚아야 하는 가장이 됐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해서 학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취업을 위해 3년 만에 전역했어요. 어학 성적이나 인턴십 경험은 없는데 빨리 취업해야 하니 글쓰기 능력을 높게 사주는 신문사에 취업했죠.” 최 대표는 교수신문 기자로 일하며 논문 표절 관련 11건의 기사를 작성하고 KBS 탐사보도 프로그램 <추적60분>과 공동 취재를 하기도 했다. “교수와 척지지 않으려는 선배들과 달리 민감한 논문 표절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뤘죠. 350편의 논문을 분석해 총장, 평교수 가릴 것 없이 자기 표절, 쪼개기 등을 일삼는 표절 연구자를 고발했고 표절 가이드라인을 세워 대안까지 제시했어요.” 

  그러나 최장순 대표는 기자 생활이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선 문제가 없었지만 막상 고발했던 연구자가 해임되자 회의를 느꼈다.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망신시키는 일이 정말 정의로운 일인지 고민하게 됐어요. 기자의 역할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있단 생각이 자꾸 들었죠.” 최 대표는 회의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사한 지 1년 만에 기자 일을 그만뒀다.

  퇴사 후 최장순 대표가 기획 업계에 발을 들인 건 언어학 전공자를 모집한다는 채용 공고를 보고 난 뒤부터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현대차로부터 의뢰받은 차명 개발을 보조하는 업무였다. “운전면허도 없는데 퇴근한 후 자동차 대리점에 가서 차를 살 것처럼 딜러들과 대화했죠. 브랜드의 매력을 발굴하기 위해 손님들이 차의 어떤 모습을 많이 보나 염탐하기도 했습니다.” 최 대표는 경영 전략, 수익 구조까지 파고들며 기업을 깊이 이해하려 했다. “선배들처럼 해외에 가본 적도 없고 강남에 살지도 않았으니 남들처럼 세련된 이미지만 신경 쓰면 뒤처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브랜딩에는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가 기업의 특징을 집요하게 찾아 활용하는 브랜딩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최장순 대표와 동료들은 현대자동차가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해 디자인 기조를 바꾸고 출시한 차종에 ‘벨로스터’란 이름을 붙였다. 벨로스터는 속도를 뜻하는 벨로시티(Velocity)와 2인승 차량(Road ster)을 합성한 말로, 혁신과 감성을 내포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최 대표는 벨로스터 출시와 함께 현대자동차 이미지를 젊게 개성했다는 호평을 받고 연이어 2013년과 2014년에 각각 ‘맥스크루즈’와 ‘아슬란’ 프로젝트를 추가로 맡았다. “기업으로부터 따로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또다시 기획을 제안해 주시면 ‘그래도 마음에 드셨나 보다’ 싶죠.” 브랜딩의 새 길을 연 최장순 대표는 이후에도 현대자동차 R&D 전략을 세우고 구찌 팝업스토어 디자인이나 카카오 AI 캠퍼스를 기획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iF, GDA에서 수 차례 수상하며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획자가 되기도 했다.

 

“사회적 역할 고려해야”

  최장순 대표는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선 주변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브랜딩과 기획은 결국 반복되는 삶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기업 이미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거예요. 틀을 깨고 나오려면 우선 기존 세계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의 팀은 배달 기사를 관찰하다 상당수가 크록스를 신고, 배달통을 꾸미는 걸 발견했다. “건장한 배달 기사들도 예쁜 스티커를 붙이며 개성을 표현하더라고요. 배달 어플 ‘바로고’의 배달 기사 전용 쇼핑몰에 다양한 크록스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냈죠.”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도 그의 섬세한 기획의 비결이다. “기획하고자 하는 대상의 세계를 90%만큼 공부해야 10%의 영감이 떠올라요. 독서만큼 쉬운 공부법은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집무실에 책을 쌓아두고 읽어요.” 최장순 대표가 2017년 LMNT를 창업한 이유도 직원들과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디자이너, 전략가, 네이머와 철학자를 한데 모으고 연구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공부만 하는 것과 느낀 점을 입 밖으로 꺼내 대화하는 건 천지 차이니까요.” 그는 불어,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6개가 넘는 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언어를 배워야 세계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에선 무지개의 색을 일곱 개로 인식하는데 다른 언어권에선 여섯 개나 두 개로 받아들여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다른 세계와 다양한 의미의 존재를 인정하고 획일화를 거부하는 태도죠.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만큼 내 세상도 넓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최장순 대표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먼저 고려하는 브랜딩을 강조한다. “광고 카피가 금세 유행어가 되듯 기업은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요. 그렇기에 기업은 수익만 추구해선 안 되고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줘야 하죠.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브랜딩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최소한 누구도 소외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최장순 대표는 대학교 4학년이었던 2001년 식당에서 밥을 먹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드사 광고를 보고 분노했다. “열심히 일한 부모님 세대의 많은 분이 1997년 IMF 때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났거든요. IMF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공동체의 역린을 건드리는 건 공감대가 부족한 기획이죠.” 

  최장순 대표는 16년째 공익 단체 매일 부르고 싶은 아름다운 이름(매아리)을 운영하며 복지단체와 사회적 기업의 브랜딩을 돕고 있다. “38년간 꾸준히 무상급식을 해온 한길봉사회의 로고 디자인과 대표 브랜드를 기획한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남몰래 봉사하시는 분들을 돕는단 생각에 참 뿌듯했죠.” 그는 매아리 활동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에 쌓은 인문학적 지식을 알리고 싶었는데, 학자들의 논문을 읽어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제겐 브랜드가 인문학을 담아 내보내는 일종의 ‘메시지 유통망’이에요. 공익 단체의 이름이나 서사에 좋은 영향력을 담는다면 그만큼 효과적인 유통망도 없죠.” 

  최장순 대표는 결국 모든 기획은 사람을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를 주도하는 언론, 정치가 자신들의 언어로 불공평한 사회를 만들었다면, 어려워도 희망을 품는 세상 역시 언어를 디자인해서 만들 수 있어요. 누군가를 소외시키려 하지 않고 다양한 세계를 인정하는 브랜딩을 한다면 이런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고 믿어요. 사람을 위한 브랜딩으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겠습니다.”

 

글 | 백하빈 기자 hpaik@

사진 | 임세용 기자 sy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