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횡단] 오래된 존재

2025-03-23     서리나 기자
서리나 기자

 

  내 기억 속 첫 오래된 존재는 자동차다. 부모님의 웨딩카는 ‘투스카니’라는 모델명의 빨간색 쿠페 자동차였다.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차를 귀여운 별명으로 부르며 나는 세상 물정 모를 때부터 투스카니를 타고 유치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갔다. 수없이 간 가족여행도 언제나 투스카니와 함께했다. 뒷자리에 앉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이 보이던 유리가 머리에 닿기 시작했을 때 내가 많이 자랐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고 어린 시선에는 도로 위에 굴러다니는 어떤 차를 봐도 투스카니보다 멋진 차는 없었다. 나는 대학에 가면 이 차를 몰 수 있을거란 기대 속에 살아갔던 것 같다.

  2022년 1월 겨울,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새로운 차를 사셨고 투스카니를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며칠간 우울했지만 쓸쓸한 마음으로 차 정리를 도왔다. 뒷자리 물건을 비우던 중 작은 수납공간을 여니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던 상어 모양 플래시가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지 가늠도 가지 않는 장난감은 역시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 찰나의 순간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나는 차를 거래업자에게 넘기기 전날 밤, 눈물을 조금 훔치고 같이 사진도 찍으며 나만의 작별인사를 행했다.

  그동안 투스카니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나는 미군기지로 팔려 간다는 소식을 듣고 험프리스 거래 커뮤니티에 들어가 투스카니를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소문해 주인을 찾아가 폐차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나중에 내게 다시 팔아달라 연락하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마트 주차장에서 목격했다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올라오는 매물도 봤지만 역시 단 하나의 차를 찾아내는 건 어려웠다. 문 옆에 붙어있는 도어가드, 휠에 있는 빨간색 선, 빨간색으로 칠한 문손잡이, 어느새 투스카니의 특징을 하나하나 해부해 내가 탔던 차를 찾고 있었고 광기 어린 나의 행동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는 오래된 연인도 아니고 없으면 죽는 것도 아닌 차 하나에 집착하고 있었다. “원래 첫 차는 잊기 힘들다”란 말, 그러나 정작 투스카니는 나의 것도 아니었다. 놓아주는 법을 몰랐던 것일까, 때가 오면 잘 이별하는 것도 오래된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어쩌면 일찍 차를 팔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추억을 쌓았더라면 작별하기 더 힘들었을 테니까. 나는 그 경험 이후 물건을 버리는 것도 한결 편안해졌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투스카니는 추억과 작별할 용기를 마지막 선물로 남겨준 듯하다.

 

서리나 기자 suhr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