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5호선 대격돌, 뜨거운 시작과 싱거운 끝

'냉전'(冷箭)은 숨어서 쏘는 화살이란 뜻으로 고대신문 동인이 씁니다.

2025-03-23     고대신문

  “그거, 네가 들고 있는 그거 지금 내 눈앞에서 당장 치우라고”

  지난 17일 늦은 밤, 일상의 피로에 지친 몸들로 포개져 있던 5호선 열차 내. 객실을 가득 채우던 커다란 고요 속에서 별안간 작은 균열이 생겼다. 잘 보이지 않는 객실 저 끝 쪽의 노약자석에서 시작된 소란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더니 어느새 모든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만히 논쟁의 이유를 들어보니 이런 것이었다.

  한 80대 노인이 당신의 옆에 앉은 중장년 남성이 들고 있는 피켓이 마음에 안 들었단다. 정확히는, 그 피켓에 써진 문구인 ‘윤석열을 파면하라’는 내용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 중장년 남성은, 당신이 뭔데 자신의 피켓을 가방에 넣으라 마라, 치우라 마라 하냐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누군가는 키득거리며 두 노인을 불구경하듯 촬영한다.

  열차가 광화문에서 공덕까지 달리는 동안 이어지던 말다툼은 기어이 몸싸움으로까지 번지는 듯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말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어르신 이제 그만 싸우세요.” 한 여성 직장인이 그들 사이에 서자 또 다른 2명의 남녀 대학생도 거들었다.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두 분 다 말이 안 통하시는 것 같으니 이제 좀….”

  그럼에도 양측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 듯했던 그 순간, “계속 이러시면 객실 내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시잖아요.” 날 선 채로 서로를 향해있던 두 개의 시선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아뿔싸, 다 우리만 보고 있구나’ 이미 상기된 얼굴빛이 좀 더 붉어진 둘은 순간 장년의 신사로 변해 “청년들, 시끄럽게 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이미 내려야 할 역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친 그가 뒤늦은 하차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악수를 건넨다. “5호선 자주 타고 다니니까 다음에 또 뵙고 얘기합시다.” “그래요. 나도 자주 탑니다. 다음엔 그런 것(피켓) 없이 뵙시다.”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심리적 내전 상태’라고 종종 묘사한다. 실제 탄핵을 찬성하는 이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이 똘똘 뭉친 현장을 보면 선고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겁도 난다.

  하지만, 끝날 것 같지 않던 두 노장(老壯)의 5호선 결전이 ‘다음 세대에게 폐를 끼치고 있구나’라는 찰나의 자각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우린 이 위기를 해쳐나가 더 나은 시대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싶다.

 

<퀘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