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폐기 수백만 권, 대학도서관의 위기
통일된 기준 없는 장서 폐기
대학의 공적 보존 기능 약화
대안은 공동보존서고
2023년 6월 울산대는 전체 장서 약 92만 권 중 45만 권을 폐기 대상으로 분류했다. 이 중 17만5294권은 학내 구성원들이 반발 한 후에야 폐기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27만6534권은 그대로 폐기가 진행됐다. 폐기 도서 선정 기준은 ‘최근 수년간 대출 실적이 없는 도서’였다. 도서의 학술적 가치나 역사적 중요성보다 대출 횟수가 우선시된 것이다. 그 결과 폐기 대상에는 절판 도서, 전공 수업에 필요한 희귀자료, 일제강점기 도서, 소장 가치가 높은 연구용 서적도 포함됐다.
대학도서관진흥법 시행령 제2조에 명시된 대학도서관 예산, 조직, 수집 및 관리 등의 조항은 강제력이 없어 폐기에 관한 사항은 대학의 재량에 맡겨진 상태다. 서가 공간 부족 때문에 장서 폐기가 불가피하다지만 다른 학내 구성원과의 충분한 논의 없이 도서관 단독 판단으로 폐기한 게 문제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장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공동보존서고와 폐기 기준 법제화가 대안으로 꼽히지만 국가 지원이 부족해 아직 실현이 어렵다. 윤희윤 국가도서관위원회 위원장은 “책 없는 도서관은 효율은 있을지언정 깊이는 잃을 수 있다”며 “학문이 지속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지키는 일에 대학은 더욱 진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서 폐기량 매년 50만 권 증가
현재까지 학술정보통계시스템에 등록된 전국 대학의 2020~2024년 장서 폐기량 합계는 1000만여 권에 이른다. 연도별 폐기 권수는 2020년 약 110만 권, 2021년 165만 권, 2022년 205만 권, 2023년 251만 권, 2024년 316만 권으로 매년 50만 권가량 증가했다.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국립대 10곳의 대학당 연평균 폐기 권수는 약 4만 권으로 하루 평균 110권 이상의 책이 각 대학 서가에서 사라진 셈이다. 노경희(울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폐기 과정에서 희귀본이나 절판본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며 “내용상으로 보면 큰 손실이다”고 지적했다.
폐기의 주요 원인은 물리적 공간의 한계다. 현재 대부분 대학도서관 서고는 설계 용량을 훌쩍 넘겨 운영 중이다. 지방거점국립대 10곳의 장서포화율은 평균 150% 정도로 가장 장서포화율이 낮은 전북대마저 2년 전 110%를 넘겼다. 이마저도 학생들의 수요에 맞춰 열람실과 휴게 공간을 확장하느라 서고 신축이 쉽지 않다. 신남호 한양대 학술운영기획팀장은 “점점 학교 도서관 공간이 부족해 해마다 책을 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홍익대 세종캠퍼스는 2022년 1층 서가를 완전 철거하고 라운지 공간으로 전환하며 도서관 장서 약 10만 권을 폐기했다. 경상국립대도 열람실과 휴게 공간 확장을 위해 3개 층이던 자료실을 2개 층으로 줄이고 5년간 약 37만 권의 책을 폐기했다. 윤희윤 위원장은 “모든 대학이 대규모 서고 건립을 추진할 수 없으니 폐기를 통한 공간 확보 압박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경희 교수는 “도서관의 역할이 변화하는 만큼 공간 활용도 달라져야 한다”면서도 “‘책 없는 도서관’이라는 역설은 대학의 정체성과 학문 전통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장서의 디지털 전환도 폐기 흐름을 가속화한다. 대학도서관들은 전자저널·전자책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수백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실물 장서의 비중을 줄이는 방식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다. 이현재 고려대 학술정보서비스팀장은 “디지털 자료는 저장 공간을 전혀 차지하지 않는다”며 “검색·열람·복사까지 필요한 순간에 즉시 제공할 수 있어 고려대 도서관의 연속간행물과 저널은 대부분 디지털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도서관도 지난해부터 연구 중심 대학에 걸맞은 다양한 학술자료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학문적 논의 없이 폐기되는 책들
대규모 장서 폐기의 큰 문제는 ‘책 박물관’ 역할을 수행하던 대학도서관이 공적 보존 기능 역할을 저버린다는 것이다. 대학도서관은 사회의 학문적 자산을 보존하는 중추다. 윤인진 관장은 “<용비어천가>, <삼국유사> 등 희귀한 장서들이 귀중서고에 보관돼 있다”고 말했다. 윤희윤 위원장은 “일반 공공도서관에 비해 대학도서관에는 그 대학에만 있는 유일한 자료가 많다”며 “학생들의 이용률에만 신경 쓰지 말고 학술 연구를 위한 원본 자료, 희귀 자료의 보존과 복원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자료는 50년, 100년에 단 한 번 사용되더라도 그 가치가 학문적·사회적으로 매우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윤 위원장은 “대구대 도서관장 시절 전국에서 대구대학교에만 있는 고서 열람을 요청하는 기자가 있었다”며 “수십 년간 한 번도 열람되지 않은 일제강점기 자료가 중요한 보도 자료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문학 분야에선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하기에 장서 보존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 문헌 연구 위주인 인문학은 고서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종이책 고유의 판형·제본·주석·삽화 등을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경희 교수는 “인문학 연구자들은 원본이나 실물 자료를 많이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윤인진 관장은 “복원 가능한 희귀본은 반드시 복원하고, 내용 손상이 심해 복원이 어려운 경우에만 디지털화한 뒤 폐기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률만을 폐기 기준으로 삼고 폐기 과정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방식 또한 문제다. 대학도서관의 학술 자료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상자는 대학 소속의 교수, 연구원, 학생들이지만 이들은 장서 폐기 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신남호 팀장은 “장서 폐기 과정은 도서관 내부 상의만 거쳐 이뤄진다”고 밝혔고 이현재 팀장도 “장서 폐기 과정에까지 연구자, 교수진이 관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전했다. 노경희 교수는 “대학 안에서 교수, 연구자, 도서관 직원, 학생 할 것 없이 장서 폐기에 관한 의견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며 “특히 대학 본부가 가장 눈치를 많이 보는 학생과 시민들의 관심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해결책은 공동보존서고·법제화
무분별하게 폐기되는 장서를 줄이기 위해서는 공동보존서고 마련이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 공동보존서고는 여러 대학도서관이 협력해 저이용 도서나 희귀본,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공동으로 보존하는 전문 시설을 말한다. 각 도서관의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대학도서관들의 장서 중복 소장을 줄이며, 자료를 장기적으로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2000년대 초반 처음 제시됐다. 미국의 프린스턴대, 컬럼비아대, 뉴욕공립도서관, 하버드대가 협력해 운영하는 ReCAP(Research Collections and Preservation Consortium) 시스템이 공동보존서고의 대표 사례다. 윤희윤 위원장은 “공동보존서고는 장서 폐기 사태를 막고 대학 간 학문 네트워킹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권역별로 중점 대학을 설치하고, 그 대학 내 공간에 주변 대학들과 함께하는 공동보존서고를 설치한다면 외부에 설치하는 것에 비해 비용 문제도 거의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실제로 고려대를 비롯한 연세대, 경희대, 한양대, 성균관대 5개 대학도서관 연합이 논의된 바 있다. 신남호 팀장은 “공동보존서고는 모든 대학도서관의 꿈이지만 대학 예산이 한정돼 교육부 지원 없이는 진행되기 어렵다”고 전했다. 대학 예산은 대부분 도서관 이외의 수업 공간을 리모델링하거나 취업 지원이나 행사 등 학생들을 위한 다른 지원금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장서 폐기 기준을 법제화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현재 대학 장서의 필수 규모나 폐기 기준을 규정하는 대학도서관진흥법 시행령은 진흥법에 속하기에 대학에서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노경희 교수는 “현재처럼 대학에 도서관 운영을 자율로 맡기면 많은 대학에서 도서관 휴식 공간만 늘리려 한다”며 “도서관에 쓸 예산을 다른 곳에 투입하느라 장서 폐기 예방과 같은 학술 기관으로서의 본질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교화된 장서 폐기 기준도 마련돼야 한다. 윤희윤 위원장은 “도서관 운영에 있어서는 직원들이 전문가지만,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는 장서 폐기를 할 때는 대학별로 교수나 다른 연구자들로 구성된 심의 위원회나 상설 기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한편 도서관이 단순 서고의 기능을 넘어 이용자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윤인진 관장은 “도서관이 공간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해야 한다”며 “특히 대학도서관으로서 연구 역량을 강화하려면 디지털 자료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주객이 전도돼 보존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주의해야 한다. 고려대는 한적 고서들을 모아 놓은 한적실처럼 귀중서고도 만들어 주요 도서를 보관하는 등 보존 기능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현재 팀장은 “도서관 공간을 개편할 때도 최대한 서고가 없는 구역을 개발해 학생들 휴식과 장서 보존을 동시에 수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노경희 교수도 “자료를 폐기하고 남는 공간에 편의 시설을 두는 게 학내 구성원을 위한 방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고려대의 120주년 전시 특별전처럼 대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잘 알리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김재현 기자 remake@
사진|최주혜 기자 choi@, 고대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