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은 약, 내 몸에서 길 잃고 헤매고 있다
위고비·ADHD 치료제·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오남용 문제
“이익 없이 부작용만 감내할 수도”
지켜지지 않는 처방 가이드라인
국가 차원의 모니터링 필요해
‘살 빼는 주사’, ‘공부 잘하는 약’, ‘몸 만드는 약’. 특정 질환을 앓는 환자를 위한 전문의약품이 미용과 학업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심지어 일부 병원까지 약물의 효능을 과장하거나 상업적으로 악용하면서 약물 오남용 문제는 점점 더 확산하고 있다. 김신곤(안암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오남용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 차원의 모니터링”이라며 “보험급여 적용이 어렵다면 오남용 위험 약제에 대한 모니터링 프로세스를 갖춰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작용에도 커지는 약물 인기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식욕 억제를 유도하는 위고비는 본래 비만 환자들의 체중 감소를 위해 개발됐지만 ‘살 빼는 주사’라는 이름 아래 비만이 아닌 이들에게도 처방되고 있다. 김신곤 교수는 “최근 비만 지표인 체질량지수가 정상인 환자가 ‘체중이 3㎏ 늘었다’며 위고비 처방을 부탁했다”며 “대학병원 의사로서 ‘위고비 사용 대상이 아니기에 처방할 수 없다’고 안내했지만 개원가의 경우 경제적 이득을 위해 처방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상 체중 혹은 저체중이 위고비를 투약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은 예측할 수 없다. 최성희(분당서울대병원 내과) 교수는 “정상 체중인 사람의 위고비 임상 데이터는 조사되지 않았기에 안전성을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김신곤 교수는 “미용 목적으로 위고비를 투약하는 경우 사용과 중단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며 “체중 변동이 심해지면 대사 건강에 악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학군지에서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이하 ‘ADHD’) 치료제가 ‘공부 잘하는 약’으로 통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 통계자료에 따르면 ADHD 치료제를 처방받은 10대 환자는 2018년 1만265명에서 2022년 1만7488명으로 약 70.37% 증가했다. 10대 환자의 증가 폭은 특히 학군지에서 두드러지게 컸다. 2018년에서 2022년 강남구, 송파구, 서초구의 환자 증가율은 각각 약 74.4%, 142.1%, 147.7%에 달했다. 서울 5대 학군지인 강남구(대치동), 송파구(잠실동), 서초구(반포동), 양천구(목동), 노원구(중계동)는 2022년 기준 서울에서 약물 치료제를 처방받은 10대 ADHD 환자가 가장 많은 다섯 자치구로 서울시 전체 10대 환자의 46.5%를 차지하고 있다.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A씨는 “ADHD라는 병이 대중화되면서부터 ‘ADHD 치료제를 먹은 학생이 집중력이 좋아졌다’며 ADHD 치료제가 공부를 잘하게 만들어 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최수안(약학대 약학과) 교수는 “교육열이 높은 이들 지역에서 유독 ADHD 치료제의 처방이 많은 것은 ADHD 치료제가 학업 목적으로 오남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ADHD 치료제가 실제로 학습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최수안 교수는 “ADHD 치료제를 사용할 때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며 “집중력을 향상하거나 졸음을 줄여주는 ADHD 치료제의 각성 효과만 부각돼 ‘공부 잘하는 약’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치료제가 가지는 급성 심혈관질환, 구강 건조, 손가락 궤양, 시력 장애 등의 부작용과 중독의 위험도 있다. 백승만(경상국립대 약학과) 교수는 “ADHD 치료제는 심혈관의 혈압을 높여 급성 심혈관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며 “신경계를 자극하는 약물을 여러 차례 투약하면 내성이 생기기에 약물 중독 문제도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방받지 못하는 약물을 구하기 위해 불법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단백질 합성을 촉진해 빠르게 근육을 만들고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특수한 의료 상황 외에는 사용이 금지돼 있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불문하고 불법 거래가 활발하다. 지난해 한 헬스트레이너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200명에게 직접 불법 유통해 검찰에 송치됐으며 SNS를 통해 4억4000만 원 상당의 불법 스테로이드를 판매한 헬스트레이너 2명이 적발되기도 했다. 최수안 교수는 “정말 처방받아야 하는 환자가 아닌데도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호르몬 분비를 인위적으로 늘리면 내분비기관이 망가져 호르몬 분비 기능이 더 저하된다”며 “불법 제조 및 유통되는 과정에서 오염되거나 과다 투약돼 위험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처방 문턱·처벌 수위 낮아 문제돼
약물 오남용이 가능한 배경으로는 비급여 의약품 처방 제도가 있다. 약물의 처방 등에 대해 모니터링이 가능한 급여 약물과 달리 비급여 약물은 모니터링이 어려워 의사의 판단 아래 쉽게 처방될 수 있다. 김신곤 교수는 “개원의들은 환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금전적 이득을 위해 위고비를 쉽게 처방해 주는 경우가 있다”며 “비급여 약품은 소비자 가격을 병원과 약국이 정해 차액을 남길 수 있기에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ADHD 치료제도 비급여 처방이 가능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의 마약류 ADHD 치료제 처방량과 심평원의 마약류 ADHD 치료제 급여 처방량 자료를 비교하면 2023년 콘서타 등 ADHD 치료제 처방이 비급여로 이뤄진 경우는 45.2%로 추정된다. 2023년부터 2024년 6월까지 비급여 처방 추정량의 79.4%가 10~30대에 집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백승만 교수는 “ADHD 진단은 의사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기에 처방 자체가 쉬운 편”이라고 설명했다. 최수안 교수는 “정신과 질환 진단에는 설문뿐 아니라 주의력 결핍과 같은 소견이 있어야 하는 등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지만 ‘공부 잘하는 약’으로 치료제를 사용하기 위해 내원한 환자들을 눈감아 주며 처방하는 병원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효성 없는 처방 가이드라인도 문제다. 지난해 10월 식약처는 위고비 국내 출시에 맞춰 처방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위고비는 체질량지수가 30㎏/㎡ 이상이거나 체질량지수가 27㎏/㎡가 넘고 고혈압 등 비만 관련 질환이 1개 이상 있는 성인에게만 처방할 수 있지만 해당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처방하는 경우도 많다. 김신곤 교수는 “식약처가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은 권고사항일 뿐 강제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ADHD 치료제도 식약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3개월을 넘겨 처방·투약할 수 없지만 백승만 교수는 “직접적인 효력은 식약처 가이드라인보다는 처방전에 있다”고 설명했다.
불법 약물 거래 역시 뚜렷한 근절책 없이 여전히 성행 중이다. 식약처 사이버조사팀에 따르면 지난 2024년 1월부터 7월까지 적발된 스테로이드 등을 포함한 의약품 불법판매 적발 실적은 1만342건으로, 오픈 마켓과 일반 쇼핑몰, SNS나 중고 거래 플랫폼 등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 불법 거래를 막기 위해 처벌 대상의 범위를 넓히는 노력도 있었지만, 아직 처벌 수위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 판매자에게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하던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경우 2022년 약사법 개정에 따라 구매자까지 처벌하도록 규정하지만, 구매자 처벌은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에 그친다. 박성철(보과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는 “의약품 불법 거래를 막기 위해선 불법 구매자의 처벌 방식을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강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약물 급여화부터 불법 판매 단속까지
전문가들은 약물 오남용 방지를 위해 비급여 약물을 급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성철 교수는 “비급여 영역에 포함되는 약물과 의료 서비스 모두 국가의 관리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며 “모든 것을 급여화할 수는 없기에 비급여 약물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신곤 교수는 “현재 100% 비급여로 처방되는 위고비의 경우 단번에 모든 처방을 급여로 전환하기는 어려우므로 비만 고위험군 환자부터 점진적으로 급여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급여 항목에 포함하는 대신 마약류 통합 관리 시스템으로 모니터링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마약류 통합 관리 시스템으로 관리되는 대표적인 약물에는 프로포폴이 있다. 김신곤 교수는 “실제로 프로포폴은 비급여 처방이 대부분이지만 연예인을 중심으로 오남용 사례가 알려지면서 현재는 심평원과 식약처가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식약처는 지난해 9월 마약류의 오남용 방지 조치기준에 ADHD 치료제의 성분인 메틸페니데이트도 추가했다. 오는 6월부터는 ADHD 치료제가 마약류 투약 내역 확인 제도에도 포함될 예정이다. 최수안 교수는 “환자들이 의료 쇼핑하듯이 처방을 요구하면 의사들이 이 제도를 통해 처방을 거부할 수 있다”며 “ADHD 치료제가 공부 잘하는 약으로 오남용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 약물 거래를 막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식약처는 주요 온라인 쇼핑몰을 대상으로 비만치료제 등을 금칙어로 설정하고 자율 모니터링하도록 협조를, 불법판매를 알선하는 SNS 게시물에 대해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접속차단을 요청하고 있다. 불법거래 단속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난 1월부터 온라인 불법 식의약품 유통 모니터링 시스템인 AI 캅스도 시범 운영 중이다. AI 캅스는 AI 기술을 활용해 온라인 플랫폼 내 불법판매 게시글을 24시간 내내 감시한다. ‘ㅇㄱㅂ’나 ‘ㅅㅌㄹㅇㄷ’ 등 약물의 초성이나 이미지 속 문자도 인식할 수 있고, 알리 익스프레스나 테무 등 해외 인터넷 플랫폼 모니터링도 가능하다. 불법 게시물을 적발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자동으로 게시물 차단을 요청한다. 최성희 교수는 “AI 캅스는 위고비나 스테로이드 등 전문의약품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비정상적 유통 구조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약물 오남용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백승만 교수는 “의약품을 맹신하기보다는 부작용과 허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오남용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수안 교수는 “약물 오남용 문제는 약물의 위력과 부작용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발생한다”며 “처벌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남용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 | 이다연 기자 dadada@
사진 | 안효빈 기자 lightb@
인포그래픽 | 주수연 기자 yoy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