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병 다른 증상, 성별 따라 진료 달라져야
성차의학 알아보기
가장 큰 원인은 성호르몬
성차연구는 정밀 의료의 출발점
“성차 반영된 치료 지침 필요해”
#1 1950년대 후반, 입덧 치료제 탈리도마이드를 먹은 임산부들에게서 팔다리가 결손된 기형아가 잇따라 태어났다. 탈리도마이드 처방이 시작된 후 2년간 유럽에서 태어난 기형아의 수만 8000명이 넘었다. R형과 S형의 입체 이성질체로 구성된 탈리도마이드에서 입덧을 완화하는 효과는 R형 입체 이성질체에 있는데, S형 입체 이성질체에는 혈관 생성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태아의 기형이 유발된 것이다. 1960년 FDA 조사 결과 탈리도마이드 개발 과정에서 임신한 동물이나 인간에 대한 임상시험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2 2010년대 초 미국 내 교통사고 중 700여 건이 졸피뎀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됐다. 대부분 여성 운전자가 전날 졸피뎀을 복용하고 잠에서 덜 깬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2012년 미국 식품의약국이 각각 500명의 여성과 남성 실험자에게 졸피뎀 10㎎을 복용시킨 후 혈중 농도를 조사한 결과, 여성은 15%, 남성은 3%가 복용 8시간 후에도 주의력 장애를 보였다. 2013년 미국 식품의약국은 여성의 졸피뎀 초회 처방 용량을 남성의 절반인 5㎎으로 낮추도록 권고했다.
#3 남성도 유방암에 걸릴 수 있다. 2020년 우리나라 전체 유방암 환자 중 남성은 0.4%를 차지하지만 이들은 유방암 2차 약제의 보험 급여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2차 약제가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여성 환자만을 대상으로 승인받았고, 임상시험에도 남성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꾸준히 유방암 검사를 받지만 남성은 멍울이 생겨도 유방암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증상이 악화한 뒤에야 내원하는 경우도 많다. 유방암에 걸린 남성은 여성보다 평균 생존 기간이 2년 짧다.
여자는 작은 남자가 아니다
성차의학(Sex/Gender-Specific Medicine)은 생물학적 성(sex) 및 사회문화적 성(gender)의 차이가 건강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성별에 따라 최적화된 치료를 제공하는 의학 분야다. 성차의학은 각종 약물 부작용 사건을 계기로 20세기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나영(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1900년도까지 대부분의 질환 연구는 남성 위주로 이뤄졌고 약물이나 의료 기구도 ‘170㎝ 65㎏ 남성’을 표준으로 개발됐다”며 “탈리도마이드와 같은 약물 부작용 사례가 거듭되며 임상연구와 약제 개발 과정 속 성별 편향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같은 질병을 겪더라도 남자와 여자의 발현·치료 양상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남녀의 성염색체 구성, 성호르몬, 에너지 대사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일옥(구로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남녀 생리적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성호르몬”이라며 “성호르몬은 생식 기관에만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호르몬 수용체는 인체 전반에 분포해 다양한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박성미(안암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성별에 따른 치료 접근은 치료 효과를 높인다”며 “성차의학은 단순히 남녀를 구분하기보다 환자 각각의 특성을 고려하는 정밀 의료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이 놓치기 쉬운 관상동맥질환
한국에서는 심장과 소화기 영역을 중심으로 기존 진단·치료 방식을 개선하는 성차의학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관상동맥질환은 심장근육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히거나 좁아져 심장근육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증상으로 협심증과 심근경색증이 이에 속한다. 관상동맥질환의 통증 양상은 남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남성은 단시간에 심장 부근에서 5분 이내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고, 여성은 윗배에서 메스꺼움과 답답함을 장기간 느낀다. 그러나 관상동맥 질환은 대부분 심장 부근에서 통증을 느낀다는 인식이 만연하기에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제때 진단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박성미 교수는 “여성은 관상동맥질환을 단순 소화 문제로 여겨 방치하는 일이 흔하다”며 “동네 병원에서 단순 소화 불량으로 진단받은 한 60대 여성이 큰 병원에 와서야 자신이 심근경색임을 알게 됐지만 이미 시간이 흘러 심장이 심하게 손상된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남녀 통증 양상의 차이는 관상동맥질환 발병 기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박성미 교수는 “남성은 *동맥경화반 파열이, 여성은 혈관 염증에 따른 협착이 관상동맥질환 발병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남성의 동맥경화반은 섬유막이 얇고 염증세포가 풍부해 쉽게 파열되는데 이때 날카로운 흉통을 느낀다. 반면 여성의 동맥경화반은 섬유막이 두꺼워 파열은 안 되지만 지질 함량은 적어 내피 손상이 쉽게 일어난다. 손상된 내피 주변부에 혈소판이 부착돼 혈류가 느려지면서 메스꺼움과 답답함이 생기는 것이다.
이에 여성 관상동맥질환 진단을 도울 해결책으로 운동부하 심전도 검사가 제시된다. 운동부하 심전도 검사는 운동 중 심장의 반응을 살펴 심장 기능을 평가하고 관상동맥질환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검사다. 박성미 교수는 “관상동맥 조영술 등 기존 진단 방식으로 이상 사항을 찾지 못해도 운동부하 심전도에서 허혈 소견이 나타나면 혈류 공급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며 “이는 관상동맥질환을 진단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암 발병 성차에서 치료법 착안
현재 국가위암검진은 만 40세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기에 젊은 여성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미만형 위암은 조기 진단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위암은 형태에 따라 장형과 미만형으로 나뉜다. 장형 위암은 암세포가 한곳에 모여 덩어리로 자라기 때문에 진단이 비교적 쉽고 예후도 좋은 편이다. 반면 미만형 위암은 작은 암세포들이 위벽을 파고들며 넓게 퍼지기 때문에 진단이 어렵고 예후도 나쁘다. 김나영 교수는 “장형 위암은 주로 고령 남성에게 발생하지만 미만형 위암은 40세 미만의 젊은 여성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난다”며 “40세 미만인 사람은 국가위암검진 대상에서 제외돼 위내시경 검사를 통한 조기 진단이 어렵다”고 말했다.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모두 위내시경 검사를 권유하기는 어렵다. 이에 피검사로 위암 여부를 예측할 수 있는 지표를 활용하는 방법이 대두된다. 대표적인 지표는 **혈청 펩시노젠 II 수치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다. 혈청 펩시노젠 II 수치가 높고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감염된 경우, 조기 미만형 위암의 발병 가능성이 더욱 커지기에 두 인자를 살피는 것이 위암 여부를 예측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김나영 교수는 “두 인자를 모두 가진 고위험군은 그렇지 않은 저위험군보다 위암 발병률이 5.2배 높았고 40세 미만 여성으로 한정할 경우 고위험군은 저위험군보다 최대 21배까지 발병률이 높았다”며 “펩시노젠 II 수치가 높은 경우 젊은 나이라 하더라도 위내시경 검사를 추가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암 발병의 성차를 역이용한 위암 치료법도 제시된다. 젊은 여성에서 미만형 위암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에스트로겐 수용체인 ERα와 ERβ 때문이다. ERα는 미만형 위암의 발생을 촉진하고 ERβ는 장형 위암의 발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김나영 교수는 “완경 전 40세 미만의 여성에서 미만형 위암이 많이 발생했고 임신 여성의 경우 미만형 위암의 진행 속도가 특히 빨랐다”고 말했다. ERα와 ERβ의 효과가 위암 치료제 연구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김 교수는 “여성에게는 ERα를 차단하는 약제를 개발하고, 남성에게는 ERβ를 증가시키는 치료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과 연구 지원이 뒷받침돼야
그러나 성차의학은 아직 의료 현장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김나영 교수는 “성차의학은 아직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며 “많은 의료인이 성차의학을 성 소수자 관련 학문으로 오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의과대학 교육 현장에서부터 성차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성미 교수는 “아직도 남녀 성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의료인들이 많다”며 “의과대학에서부터 성차의학을 교육하고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성차의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하에 2018년엔 서울대 의과대에서, 2022년엔 고려대 의과대에서 성차의학 강의가 개설됐다. 박성미 교수는 “성차의학 강의를 여는 대학이 전국에 두 곳뿐이지만 그마저도 선택과목에 불과하다”며 “성차의학을 필수 의학 교육과정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 현장에서 성차가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 기반을 다지는 일도 필요하다. 한국은 미국 등 성차의학 선진국에 비하면 성차의학 관련 연구 규정이 미흡하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1987년 임상연구 대상자에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원칙을 발표했고, 2015년엔 연구비 지원서에 해당 연구가 성·젠더를 고려하고 있는지 명시하도록 규정했다. 김나영 교수는 “최근 네이처 등 다수의 학회지는 남녀를 분리해 분석하지 않은 논문은 성차 분석을 요구하며 반려하는 정책도 펼치고 있다”며 “한국도 연구 단계에서 성차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2021년 3월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성별 특성을 반영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과학기술통계지표 조사·분석과 기술영향평가에서 성별 특성 분석이 반영돼야 한다. 김 교수는 “안타깝게도 해당 법안에 강제력이 없어 뚜렷한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개정안은 국내에서 성차연구를 법제화하려는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성차의학 연구비 예산 마련도 중요한 과제다. 안준용(보과대 바이오시스템의과학부) 교수는 “성별을 고려한 질 높은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비 지원 확대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한국에서 성차의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편성된 R&D 예산은 없지만 최근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2월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성별 차이에 의한 예방·진단·치료·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관계와 소화기계를 우선 대상 질환으로 각각 4년간 총 37억5000만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학술연구개발용역과제를 공모했다. 소화기계 부문 과제에 선정된 김나영 교수는 “임상에서는 치료 지침이 매우 중요한데 이번 연구로 성차가 반영된 가이드라인이 마련될 것이 기대된다”며 “앞으로는 성차 기반 연구 지원이 활발해지고 성차의과학에 대한 R&D 투자로도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맥경화반: 동맥 내막에 콜레스테롤과 지질이 축적되고 이를 둘러싼 섬유막에 염증세포가 모이면서 형성되는 만성 염증 덩어리.
**혈청 펩시노젠 II: 위 점막의 염증 상태를 반영하는 소화 효소의 전구물질.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위에 감염돼 위염, 위궤양, 위암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세균.
글 | 이다연 기자 dadada@
일러스트 | 박은준 전문기자
사진제공 | 김나영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