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심 있는 법조인, 정의 실현에 앞장선 반백년
이진강(법학과 62학번) 인촌기념회 이사장 인터뷰
역동적 삶 위해 검사 선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저지
“좌우 가리지 않고 원칙만 생각”
검사부터 변호사,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거쳐 대법원 양형위원장까지 50년가량 현장과 재야를 넘나든 이진강(법학과 62학번) 인촌기념회 이사장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법조인의 교과서다. 그는 죄지은 청소년을 무작정 다그치고 엄벌하기보다 스스로 반성하도록 도우면서도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새마을 비리 사건 단죄에 나서는 등 권력의 잘못에 대해선 누구보다 엄했다. “법조인, 특히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예요. 약자를 도우면서도 언제나 죄지은 사람이 정당한 벌을 받는다는 기본을 지켜야 공익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나라 생각하던 소년에서 검사로
중학교 시절부터 공부가 취미였던 이진강 이사장은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수리나 과학보다는 사회나 국어 과목을 좋아하던 그는 자연스레 법학과를 지망했다. “당시 분위기는 국가에 대한 헌신이 먼저였기에 공부를 잘하는 문과 학생은 당연히 법을 전공했어요. 저도 법학과에 진학해 사회 질서 확립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울대 법학과를 지망했지만 생각보다 낮은 학력고사 성적 탓에 고심하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늘 1등 하던 고등학교 시절엔 법학과 외에는 다른 학과를 일절 고려하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학력고사를 못 쳤어요. 아버지가 민족사학인 고려대는 어떠냐고 하시길래 고대법대를 가자고 결정했죠. 장학금을 받는 학생과 점수 차가 크지 않았는지 면접관이 왜 우리 학교에 왔냐고 묻더라고요. 서울대를 못 간 어린 마음에 자존심이 상해 공부 잘하는 학생은 고려대 오면 안 되냐고 답했어요.”
입학 후 독서와 당구를 즐기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던 이진강 이사장은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 사회 과목을 많이 공부해서 법학이 낯설진 않았어요. 오히려 점점 흥미가 붙었죠.” 당시 고려대는 법학에 두각을 보이는 그를 교수로 임용하고자 했다. “학교에서는 독일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하거나 민사소송법 강의를 맡기는 등 회유하기도 했죠. 그러나 가족들이 교수는 나중에도 할 수 있으니 법조인이 되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 결국 공직을 택했습니다.” 재수 끝에 제5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진강 이사장은 검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엔 공무원이 최고라는 이유로 변호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저도 판검사 중에 고민하다가 역동적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 검사가 되기로 했죠. 아버지께서도 검사로서 바른 일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검사로 임용되기 전 군에 입대한 이진강 이사장은 1969년 월남전에 참전했다. “법무관으로 7~8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갑자기 베트남으로 가야 했어요. 동기들과 선배들은 저마다 이유를 대며 후방으로 빠졌죠. 난감했지만 한번 발령이 나면 뒤집기 어려울 뿐더러 성격상 주어진 일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라 새로운 세상 가는구나 생각했어요.”
이진강 이사장은 후방 사령부에서 법무관으로 배속돼 사병들을 대상으로 군법을 교육하는 등 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다 수류탄 사망 사건의 용의자를 찾으며 검사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장교숙소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군인 여럿이 사망했어요. 현장을 조사하다가 찢긴 창문 방충망을 발견했고 근방에서 수술용 메스를 발견해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죠. 그때 검사의 역할과 진실을 밝히는 용기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냉철함보다 따뜻함으로 다가가다
1973년, 전역 후 두 번째 발령지인 목포지청에서 검사로 근무하던 이진강 이사장은 수많은 비행청소년을 지도했다. “당시 관할 구역인 진안군에는 경제·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인 사람이 많아 청소년들도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환경이었어요. 법을 어긴 청소년들을 무작정 처벌하면 다시 죄를 지을 게 뻔했죠. 잘못한 청소년들과 만나면 일단 목욕부터 시킨 뒤 반성문과 서약서를 쓰게 해 스스로 뉘우치도록 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친 청소년들이 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검사의 역할을 이해했다. “무서운 검사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무섭기만 한 검사가 진짜 검사인 건 아니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변화하도록 돕는 게 검사가 진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과 함께한 경험 덕에 이진강 이사장은 보호관찰제도 도입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을 지도하면서 보호관찰제도의 필요성을 몸소 느꼈어요. 교도소에 구금하면 사회에 나와서도 더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도 눈여겨봤죠.” 이 이사장은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등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를 직접 방문하며 보호관찰제도 도입을 위해 노력했다. 각고한 노력 끝에 1988년 국내에도 보호관찰제도가 도입됐다.
강릉지청에서 근무할 때는 광부들과 적극 교류하며 지냈다. “지청 차원에서 ‘법의 생활화 교육’을 통해 광부들을 격려하고자 했어요. 광부들은 밤낮의 구분 없이 갱도에서 근무하고 있었거든요. 법률 문제 상황에서 고단함을 참작하거나 광산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죠.” 1978년 11월, 갱도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자 이진강 이사장은 주저 없이 지하로 향하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두 대 중 한 대가 추락한 상황이었어요. 솔직히 무서웠지만 당시엔 현장을 검증하는 검사가 총책임자였으므로 제가 주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독일에서 온 엘리베이터 기술자들을 안심시킨 뒤 함께 지하로 내려가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현장과 친숙한 법조인이었지만 학구적이기도 했던 이진강 이사장은 특기를 살려 책을 저술하거나 방송에 나와 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검사 중에선 민법을 가장 잘 안다고 소문이 나서 법무부 보호국에서 근무하던 중 민사법 전문위원 겸직 발령이 났어요.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집세를 내는 국민 누구나 알아야 할 법이라서 법 개정 취지와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책도 저술하고 KBS 프로그램 보도본부 24시에 출연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원칙에 따라 구현한 정의
이진강 이사장은 따뜻한 검사를 지향하면서도 원칙을 두고는 타협하지 않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도 그 덕분이다. “사건을 최초로 보고받진 않았지만 총장 아침 보고에 참여하다 공안부가 사건을 인계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이후 이 사건을 취재하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게 내용을 확인시켜 줬어요.” 그는 사건의 주요 피의자였던 조한경 경위의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 하자 경찰에서 은폐·조작을 시도하더라고요. 수사에 난항을 겪던 중 주요 피의자인 조한경 경관을 조금만 설득하면 다 털어놓을 것 같았죠. 국가를 위해 헌신한 건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밝혀야 법정에서 불리하지 않을 거라며 설득했고 사건의 전말이 적힌 성경책이 있다고 자백받아 하룻밤 사이에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진강 이사장은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죄를 지으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기본을 지키고자 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후 이른바 ‘5공 비리’를 청산하는 데 앞장섰던 것도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 이사장은 ‘새마을 비리 사건’의 피의자인 전경환 씨의 구속 과정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폈다. “열심히 수사해 구속했는데 검찰총장이 전경환 씨가 수갑 차는 모습은 공개하지 않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어요. 권력과 관계없이 잘못은 단죄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해야 한다고 적극 반박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종결 후 고작 10개월밖에 흐르지 않았기에 국민 대다수가 전두환 씨의 동생인 전경환 씨가 수갑 차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기도 했죠.” 그는 충실한 직분 수행을 되새기면서도 권한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경계했다. “검사가 구속영장 발부를 결심하면 대상자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영장을 신청할 때마다 제 이름 석 자를 작성하면서 직분의 무게를 느끼려 했죠.”
1994년, 이진강 이사장은 잦은 수사로 건강이 악화돼 23년 몸담은 검찰을 떠났다. 그는 변호사라는 새 길로 나섰지만 오랜 검사 생활을 보냈다는 이유로 눈치 보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검사로 오래 재직했기에 법조계에 상사가 많았어요. 특히 법정에서 친한 검사들이 저와 반대 위치에 앉기도 했죠.” 그는 변호사로서도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신뢰가 가장 중요해요. 상호 간 신뢰가 깨지지 않는 이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의뢰인을 끝까지 지키고 도와주는 게 변호사의 임무죠.” 확고한 원칙에 따라 그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구속기소 된 주영복 전 국방부 장관을 변호하기도 했다. “피고인이 대통령 등 껄끄러운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공판에 참석하지 않으려 하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울 테니 걱정 말라고 말했고 무사히 공판에 나섰죠.” 주 전 장관은 검찰이 구형한 15년보다 적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진강 이사장에게 변호사는 봉사하는 길을 열어준 직업이기도 했다. 그는 서울변호사협회 부회장이 된 후 2년간 국선 변호인을 맡아 봉사를 실천했다. “변호사는 ‘돈 버는 직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하지만 그건 대형 로펌에서 엄청난 수임료를 받으며 하는 변호사들의 이야기일 뿐이에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해도 진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국선 변호사가 진정한 변호사라는 생각에 자연히 지원했죠.” 그는 주변 변호사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제44대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 회장이 됐다. 변협 회장으로서 신설된 로스쿨을 정착하는 데 힘쓰며 법학 발전에도 기여했다. “로스쿨은 법조인 양성소에 불과하고 법 이론을 가르치지는 않기에 대학이 거대한 로스쿨 입시판으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봤어요. 하지만 제가 부임할 때는 도입이 결정된 이후였으니 로스쿨이 법 이론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힘쓰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세계 수준의 인재를 육성할 역량을 갖추기 위해 미국, 싱가포르, 영국 등 각국 변호사 단체와 교류했죠.”
그가 변호사 활동을 그만두고 제2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 위원장이 된 건 보다 넓은 차원에서 공익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방심위는 국민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공정성과 공공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법조인 출신으로서 투명한 운영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방심위원장으로서의 생활은 20개월 남짓으로 끝났다. 재임 기간 내내 정치권의 견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방심위는 민간 독립기구이긴 하지만 결정 하나하나가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법조인으로 살아오면서 좌우 상관없이 공정히 일 해왔다고 자부하던 터라 20개월 만에 관뒀습니다.” 이후 그는 풍부한 법조 경력을 바탕으로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사법의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한 뒤 2023년부터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진강 이사장은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사회와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법학과를 선택했기에 꿈 없이 살았다는 미련도 조금 남지만 참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풍부한 경험과 이해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법조인이든, 경영인이든, 어떤 길을 가든 원대한 포부만큼 충분히 경험을 쌓고 다른 견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고대 후배들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크게 기여하면 좋겠습니다.”
글 | 호경필 기자 scribeetle@
사진 | 김준희 기자 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