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FLIX] 걔는 왜 죽어서까지 그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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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별점: ★★★★☆
한 줄 평: 귀신 눈망울이 예뻐서 무섭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다. 밤이 되면 스스로 움직이는 조각상, 정전 난 학교에 울려 퍼지는 방송, 옥상에서 1등을 밀어버렸다는 2등. 공포가 일으키는 목덜미의 소름과 심장의 떨림이 좋았다. 공포를 애호하는 마음이 한국 공포 영화의 기둥을 세운 <여고괴담> 시리즈를 정복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써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1998년 작 <여고괴담>을 틀었다.
<여고괴담>의 서사는 전설에 가깝다. 전설은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다. 고귀한 신분과 비범한 능력을 타고나 세상을 구하는 신화의 주인공과 달리, 예사 인간에 불과한 전설의 주인공은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좋은 성적을 받아 출세하고 싶다는 식의 욕망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이룰 힘은 없다. 담임은 자신만의 예술을 하고 싶다는 지오의 그림을 마구 찢어발겨 버린다. 1등을 이기지 못해 미친 2등은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따귀를 맞는다. <여고괴담>에서 학교는 학생 개인의 욕망에 귀 기울여주는 공간이 아니다. 영화에는 교실 책상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CCTV처럼 내려다보는 쇼트가 자주 등장한다. 같은 옷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검은 머리통들에는 이름이 없다. 학교는 학생들은 구별해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구별되지 않는 모습은 학생들이 ‘성실히 공부해서 밥값 하는 인간이 되기’라는 공동의 목표를 부여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는 학교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표현한다. 부조리를 극복할 수 없는 평범한 소녀들은 상처받고 좌절할 것이다. 소망은 좌절되고 낙관적 결말은 쉽게 오지 않는 게 전설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다루는 진지한 태도는 전설의 매력이다.
전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설은 그 내용을 증명하는 비석, 자연물, 건물 등 증거물을 동반하고, 증거물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담보한다. <여고괴담>의 증거물은 재이가 만든 은영의 조각상이다. 조각상은 재이가 친구와 선생으로부터 당한 폭력을 증언하고 한이 맺혀 10년째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연을 설명한다. 지오는 미술실 바닥에서 발견한 조각상을 만져 재이의 기억을 흡수하고 그가 교사들을 죽인 귀신이었음을 알아챈다. 영화는 조각상을 통해 단짝인 재이가 귀신이었다는 반전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주인공의 친구가 사실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다는 뻔한 반전도 전설의 증거물에 해당하는 조각상으로 전달하니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넣은 듯한 쾌감이 느껴진다.
패배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자신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모습은 우리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학생들은 폭력적인 교사를 ‘미친개’, ‘늙은 여우’ 같은 멸칭으로 부르면서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한다. 복수는 죽어서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나서야 허락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고통으로도 지울 수 없는 개성이 있고 친구를 소중히 하는 마음이 있으며 꿈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학교에서 더 많은 걸 해보고 싶었다는 재이의 절규는 그래서 더 아프게 들린다. <여고괴담>은 신화가 아닌 전설이어서 투쟁하는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아름다운지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늘 승리하는 인간을 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세계와 대치하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일 테다.
유나연(미디어대 미디어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