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졸업장에 길 잃은 클래식 영재들

2025-08-03     정혜린 기획2부장

조기 교육에 경쟁 시달려

유학 후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연구 강화·교육과정 다변화 필요

 

 

  한국인 음악가가 세계 유수의 국제 콩쿠르 수상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02년부터 2022년까지 세계 3대 콩쿠르(쇼팽·퀸 엘리자베스·차이콥스키) 입상자 286명 중 36명이 한국인으로, 러시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23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한국인 참가자가 6개 부문 중 3개 부문에서 우승했다. 과거 조수미, 정명훈 등 유학으로 실력을 다진 해외파 음악가가 각광받았다면 최근엔 임윤찬, 박재홍 등 국내에서 수학한 이들의 경쟁력이 두드러진다. 많은 클래식 음악 영재들이 조기 교육으로 싹을 틔우지만 학위와 연주 기술을 중시하는 풍토 탓에 국내에서 음악가로 자리 잡지 못한다. 이에 음악대학의 교육 기능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트로피 이면의 치열한 입시 경쟁

  국내파의 국제 콩쿠르 입상 비결로는 체계적인 영재 교육 시스템이 꼽힌다. 학부모의 교육열에서 촉발된 조기 음악 학원의 유행과 영재원을 중심으로 한 영재 교육이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위탁 운영 중인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국내 예술영재 교육의 중추 기관이다. 2022년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양인모, 최하영, 임윤찬, 김가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송무경(연세대 대학원 음악학과) 교수는 “국내 음악대학과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의 우수한 교수진이 국내파 육성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음악 재능을 보인 학생 대부분이 어린 나이부터 콩쿠르와 입시 경쟁에 내몰린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선 실전 무대 경험이 중요하고 특히 국제 콩쿠르 입상이 유명 단체와의 협연 기회나 소속사 계약의 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극심한 경쟁에 더해 정석적인 연주와 기술을 중시하는 음악대학 입시는 학생들의 개성과 흥미를 잃게 만들기도 한다. 김우빈(한양대 성악25) 씨는 “콩쿠르는 실력을 객관화할 기회이지만 경쟁 부담이 크고 음악의 본질보단 결과에 매몰돼 성악에 대한 회의를 겪었다”고 했다. 이신영(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21) 씨는 “입시 시험으로 제한 시간 내 주어진 동기와 형식에 맞게 음악을 작곡해야 했는데 학생 대부분이 기본 화성 틀, 음형을 설정한 후 어떤 문제에서든 비슷한 전개를 사용한다”며 “곡 내용보다 악보의 가독성에 주목하는 평가 방식도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콩쿠르에서 예술적 기교로 주목받아도 개성과 상상력을 잃으면 진정한 음악가로 인정받기 힘들다. 바이올린 강사 김문철(남·37) 씨는 “예중·예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잦은 실기시험과 연주회 등으로 단기 성과를 끊임없이 요구받는다”며 “나쁜 습관을 고칠 시간도, 음악을 고민할 여유도 없는 환경에선 음악가를 키울 수 없다”고 했다. 김시형(명지대 대학원 음악학과) 교수는 “정답이 정해진 음악을 강요하면 창의적 음악가가 아니라 완벽한 연주자를 만드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막대한 학위 값에도 취업 불안정

  음악대학 진학을 위해선 경쟁 외에도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 국내 대표 예술중학교인 예원학교의 등록금은 1년에 약 900만 원, 사립 예술고등학교는 1년에 약 800~1000만 원에 달한다. 입시 실기 시험을 준비하려면 1:1 개인 강습이 필요하기에 사교육 의존도도 높다. 채나현(서울대 피아노24) 씨는 “선생님마다 레슨비가 다르지만 *마스터클래스, 입시 평가는 시간당 10~20만 원 정도”라며 “입시 준비 시기엔 최소 10회 이용한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통한 해외 학위 취득도 관행처럼 여겨지지만 역시 비용 부담이 크다. 국립대학 위주인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대학은 등록금이 연간 몇천 유로로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줄리어드 음대 등 미국 음악대학 학비는 연간 4만 달러 이상이다. 비올리스트이자 <음악저널> 대표인 이홍경 씨는 “사실상 유학 결정으로 음악을 더 깊게 공부할지 바로 사회생활을 할지 진로를 굳히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위 취득 후 귀국해도 국내에서 음악가로 자립하는 일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다. 협소한 국내 클래식 시장의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활동 무대가 한정적이고 수입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 전공자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은 교향악단, 합창단이나 교원 임용 등으로 제한적이며 일자리도 매우 적다. 시향악단 단원은 충원 채용 방식으로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입단이 어려운 편이다. 올해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정규 단원으로 플루트 1명, 호른 2명만을 채용했다. 김문철 씨는 “기본적으로 입단 경쟁이 치열한 편이고 솔리스트로 자라온 연주자들이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힘든 환경이라 자리도 악장, 수석 위주로 나온다”고 말했다. 해외 학위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탓에 교원 임용 문턱도 높다. 김시형 교수는 “해외 대학 학위는 교원 임용이나 주요 오케스트라 입단 오디션에서 강력한 보증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결국 클래식 음악 전공자 대다수는 생계유지를 위해 개인 강습에 뛰어든다. 단기 계약직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들은 불안정한 수입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술인 실태조사 결과 음악인의 예술창작활동 수입(901만 원)과 예술 관련 교육활동 수입(1249만 원)을 합쳐도 비예술활동 수입(2393만 원)보다 적었다. 이신영 씨는 “음악 활동을 하려면 다른 직업을 겸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실연 중심 교육, 응용 연구 보완해야

  이처럼 불안정한 취업 현실로 인해 음악대학 교육과정을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연에 필요한 이론과 실기 과목 위주 커리큘럼은 전문 실연자 외 진로를 모색하려는 시야를 좁힐 수 있어서다. 채나현 씨는 “예술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배운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며 “공연 기획이나 행정을 배우려면 복수전공을 하거나 동아리, 학회 등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고 했다. 국내외 일부 음악대학에선 예술경영 세부 전공을 개설하고 있지만 성악·기악 등 실기 위주 전공과는 분리돼 있다. 김시형 교수는 “이미 사운드 디자이너, AI 음악 개발자 등 새로운 음악 직군과 산업이 부상하는 만큼 음악대학이 실연자만 양성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음악대학만의 고유 기능인 실기 위주 교육과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성연주(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클래식 음악 전공생들은 실연자로서의 성공을 목표하기에 실연에 뛰어난 교수로부터 배우고 싶어 한다”며 “1%만 실연자로 성공하고 99%가 뚜렷한 진로를 꿈꿀 수 없다는 문제에 공감하지만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연 중심 교육에 집중하다 보니 그 외 교육까지 음악대학에서 제공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수의 음악대학에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도교수 배정을 신청해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간다. 채나현 씨는 “지도교수님이 1:1 지도를 통해 학습과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해 주셔서 좋다”고 말했다. 이러한 도제식 교육이 학생의 맞춤형 학습과 실기 역량 향상에 효과적이지만 음악대학 교수진은 연구 실적을 공연 경력으로 대체할 수 있어 음악대학의 연구 역량이 미비하단 지적도 나온다. 송무경 교수는 “한국의 연주는 이미 최고 수준이지만 음악가의 연주와 해석 등 행위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연주학 연구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홍경 씨도 “연주 잘하는 교수도 필요하지만 학생들의 진로를 넓힐 수 있는 응용 분야 연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취업난으로 외면받는 음악대학은 대학 운영의 후순위로 밀려나 변화를 모색하기 힘들다. 송 교수는 “학과의 지원자가 줄면 2명의 교수가 퇴임했을 때 1명만 뽑는 등 충원 인원을 줄여서 구조조정을 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학령 인구 감소로 정원 미달이 일상인 지방대 음악대학의 경쟁력은 더욱 약해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거나 폐과 절차를 밟고 있다. 

  결국 음악가들이 학교 밖에서 활약할 수 있는 분야를 다양하게 조성하려면 근본적으로 클래식 음악 시장을 키워야 한다. 이신영 씨는 “교육 시스템이 선진화돼 있지만 클래식이 비주류라 음악 활동을 이어가기가 힘들다”며 “정기 공연 지원 사업·공모 등이 동반돼야 한다”고 했다. 송무경 교수는 “1990년대 유학이 자율화되며 소득과 관계없이 음악 전공자들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부자만 음악을 한다는 인식 때문에 클래식 음악은 국가 혜택에서 배제된다”며 “국가가 음악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마스터클래스: 전문가가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 음악계에선 저명한 음악가, 교수, 악단 연주자 등이 공연 홀이나 대형 강의실 등에서 공개 레슨을 진행함.

 

글 | 정혜린 기획2부장 byye@

일러스트 | 박은준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