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먼 클래식, 진입장벽 허물고 다가가야
딱딱한 이미지·방대한 지식이 장벽
연주·감상 등 체험형 교육 필요
“콘서트홀 밖에서도 관객 만나야”
이홍주(의과대 의학20) 씨는 지난 3월 서버시간을 알려주는 홈페이지를 이용하며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독주회 예매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티켓을 얻지 못했다. 문스대 미디어문예창작전공 21학번 A씨는 손이 느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독주회 티켓을 예매하지 못해 티켓 가격의 15~20%를 더 지불하고 암표를 구매했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연주자의 독주회 티켓은 오픈 후 1~2분 내 매진되기 일쑤다. 2022년 조성진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은 40초 만에 매진됐으며 2023년 임윤찬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도 1분 만에 매진됐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클래식 음악가의 인기를 ‘K-클래식 붐’, ‘클래식힙’으로 표현하지만 실상은 음악가 개인에 주목할 뿐 서양 고전주의 음악인 클래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아직 미약한 수준이란 평가가 나온다.
연주자 팬덤이 관객 된다
최근 젊은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팬덤 문화가 형성돼 특정 인물의 팬이 실제 클래식 공연장의 관객이 되고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의 팬인 김도이(여·21) 씨는 “이전까진 클래식 음악이 익숙지 않은 언어를 듣는 듯 막막하게 느껴졌는데 두 사람의 연주를 접하며 공연장을 찾았고 음악 취향을 알아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수인(한양대 음악연구소) 연구교수는 “특정 연주자에 대한 주목은 클래식 음악에 많은 사람을 노출시켜 긍정적”이라며 “팬덤 문화 형성은 클래식 음악계에선 반길 만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슈퍼스타나 유명 악단으로의 인기 쏠림 현상이 나타나며 클래식 음악과 대중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단적인 예로 클래식 음악의 전형적 요소를 포함해 클래식 음악의 대표 공연 장르로 평가받는 오페라 공연 횟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통계에 따르면 오페라 공연은 2012년 1212회 이뤄졌지만 2020년엔 337회만 열렸고 대관 공연 관객 수도 45만3999명에서 2만9991명으로 대폭 줄었다. 또 2025년 상반기 공연예술통합전산망 보고서에 따르면 클래식 공연 건수와 공연 회차는 전년 동기 대비 2.6%, 7.2% 증가했지만 티켓 판매액은 약 361억 원으로 약 24.2% 감소했다. 정경영(한양대 작곡과) 교수는 “아직은 연주자의 팬덤이 클래식 음악 전체에 대한 팬덤이 아님을 체감한다”며 “진정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전했다.
어렵고 고상하단 편견 여전해
클래식 음악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건 화려한 공연장에서 고소득자와 전공자 위주로 향유되는 엘리트 예술이란 이미지다. 최근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생긴 정지희(여·21) 씨는 “작곡가나 지휘자 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공연을 제대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공연 관람이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은 역사가 길고 여러 장르와 기법, 사조, 역사가 얽혀 있으며 과거의 음악을 현대 음악가가 해석해 연주하는 만큼 감상에 폭넓은 지식이 요구된다. 정경영 교수는 “클래식 음악이 자생 문화가 아니라 유럽에서 전파된 문화라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취향처럼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며 “지식이 예술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진입장벽으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박수인 연구교수는 “베토벤이 살던 시기의 음악 창작 양식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음악 감상 경험엔 분명 질적 차이가 있겠지만 잘 몰라도 감흥을 느끼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형식적인 이론 수업으로 그치는 국내 음악 교육과정이 클래식에 친숙함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도이 씨는 “초·중·고 내내 이론 중심의 단기 학습만 이뤄졌고 음악 교과가 타 교과에 비해 비중이 작아 클래식 음악에 대한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고 말했다. 정찬영(남·19) 씨도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수업은 듣기·가창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 진행된 것이 전부”라고 했다. 손민정(한국교원대 음악교육과) 교수는 “대학 입시와 가까울수록 학생과 교육 기관 모두 예술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단순히 곡과 배경지식을 공부하고 외우기보단 음악을 체험하고 감상의 배경을 추론하도록 돕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체험 위주 음악 교육이 클래식 음악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각자 선택한 악기를 배우고 학기 말 발표회를 여는 비교과 프로그램 ‘1인 2기’에 참여한 김도이 씨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공연을 감상하는 교육 방식이 음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고려대 관현악단에서 활동하는 이지아(경영대 경영23) 씨도 “스스로 곡을 해석하는 입장이 되니 음악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작곡가와 레퍼토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손민정 교수는 “교육은 교육부, 예술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담당하기에 예술교육 관련 공조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며 “교육 연구자와 현장 교사, 지역 예술인이 협력해 학생에게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도록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다양한 장소·장르로 대중에게 접근한다
국내 음악 단체들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콘서트홀 밖으로 나오고 있다. KBS교향악단은 2017년부터 ‘직장인 클래식 시리즈’로 점심시간 강남 파이낸스센터 로비에서 직장인을 위한 연주를 선보였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023년부터 서울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찾아가는 ‘뮤지엄 콘서트’로 실내악 공연을 진행해 왔다. 정경영 교수는 “음악가들이 경직된 연주 환경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소에서 대중과 만나고 자신을 알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클래식과 타 장르를 융합하는 크로스오버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2007년 결성된 클래식 현악 앙상블 ‘디토’는 2019년 해체했지만 대중음악, 재즈 등 타 장르와의 융합 무대를 적극적으로 기획하며 실내악의 저변을 넓혔다고 평가받는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020년부터 SM Classics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K-POP과 클래식 음악을 융합한 콘서트 시리즈를 열고 있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는 “대중적으로 많이 소구된 음악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며 “융합적 시도가 클래식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오케스트라 구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오케스트라가 영화, 애니메이션의 OST를 연주하는 필름 콘서트의 성장도 두드러진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3분기 서양음악 공연 내 필름 콘서트가 차지하는 티켓판매액 비율이 34%에 달하고 클래식 공연 티켓판매액 상위권 10개 작품 중 2개가 필름 콘서트였다.
일각에선 이런 클래식 음악의 대중음악화를 반기지 않는다. 대중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클래식의 역사성이 상실된다는 우려에서다. 이지아 씨는 “서로 다른 장르가 완전히 섞였을 땐 클래식 특유의 미학과 형식이 흐려질 수 있다”고 했다. 조성진 씨도 2018년 전국투어를 앞두고 기자간담회에서 “대중이 클래식에 익숙해지는 대중의 클래식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크로스오버의 유행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정경영 교수는 “필름 콘서트 관객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콘서트홀에서 감상하는 관현악단의 연주라기보단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게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음악”이라고 봤다.
이에 장르의 고유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클래식의 매력을 알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박수인 연구교수는 “입문자의 나이, 취향 등을 반영한 촘촘한 기획으로 만들어진 공연 콘텐츠가 유입된 관객들의 지속적인 향유를 도울 것”이라며 “지자체와 정부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경계를 넘나드는 지반이 단단해질 것”이라 말했다.
글 | 정혜린 기획2부장 byye@
사진 | 최주혜 기자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