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쌀롱] 토끼는 사라지지 않고,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 정보라의 <저주토끼>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평과 감상을 전합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SF를 사고실험의 장르라는 의미에서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이하 SF)라 불렀다. 그렇다면 정보라의 SF는 고통, 두려움 등의 정동이 새로운 상상력을 관통하는 이른바 ‘정동적 SF’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주토끼>의 표제작 ‘저주토끼’는 정동적 반복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사이클을 명증하게 보여준다. ‘나’의 할아버지는 저주 용품을 만드는 장인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친구가 부도덕한 경쟁 회사의 음모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저주를 만들지 말 것”이라는 가문의 불문율을 어기고, ‘저주 토끼’를 만든다. 그 결과, 경쟁 회사는 파산하고 가문은 무너진다. 복수는 성공했으며, 할아버지의 서사는 끝났다. 그러나 토끼의 저주는 끝나지 않는다. 집을 나간 할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 대신 밤마다 유령이 된 할아버지가 귀환한다. 이 반복은 독자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토끼 모양 전등 불빛 아래, 이야기를 반복하는 할아버지의 존재감을 떠올려보라. ‘저주토끼’는 선형의 복수담을 원형의 정동 서사로 전환하며, 반복과 잔존, 울림의 감각을 소설 전체에 되먹임한다.
‘안녕, 내 사랑’을 살펴보자. ‘나’에게는 세 개의 안드로이드가 있다. 신형(‘S12878호’), 구형(‘D0068호’), 초기 모델인 ‘1호’가 그것이다. ‘나’는 안드로이드 1호를 사랑한다. 그러나 1호는 매우 낡았고, 곧 전원이 꺼질 위기에 처했다. ‘나’는 새로운 안드로이드에 1호의 기억을 이식해, 사랑을 지속하려 한다. 그 순간, 동기화된 세 안드로이드가 ‘나’에게 다가와, ‘나’의 몸을 사정없이 찌른다. 셋이 돌아가며 말했지만, 모두 1호의 말이다. “나는 당신만을 위해 존재했어요.” 그러고는, 죽어가는 ‘나’에게 입을 맞추며 말한다. “안녕, 내 사랑.” 이 말은 1호가 작동을 멈추려는 시점에, ‘나’가 1호에게 입을 맞추며 건넸던 그 인사다. 이 소설은 사랑의 고유성이 품고 있는 이율배반을 보여주면서도, 정동의 균열이 어떻게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드러낸다. ‘찌름’은 물리적/육체적 행위이지만, 동시에 관계적 의미를 띤다. 사랑의 말은 복수의 도구가 된다.
정보라의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정동이 관계를 매개하는 사물을 통해 반복되며, 변형된 채 되돌아오는 방식을 보여준다. 정동은 단순한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한 존재로부터 타자를 거쳐, 사물에 침투하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행적인 상호작용의 효과다. 토끼-주물이 저주의 말과 정동을 보존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방출함으로써, 손주인 ‘나’를 감싼다. 안드로이드 1호의 사랑은 기억의 환류 속에서 ‘나’에게 (적어도 세 번) 귀환한다. 관계는 종결을 선언한 순간에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말’은 이미 발설했다고 믿는 자리에서 계속 울려 퍼진다. 여기서 사물은 ‘되살림의 장치’라는 점에서 주물적 메커니즘의 장소다. 반복은 세대를 극복하고 종차를 넘어선다.
과학소설로 번역되는 SF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 다르게, 정보라의 ‘정동적 SF’는 단순히 미래를 앞당겨 상상하는 장르가 아니다. 아직 멈추지 않은 기계, 사라지지 않은 감정, 맴도는 말을 반복하는 (비)존재에 주목한다. 핵심은 예측이 아니라 울림이다. 울림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형식으로, 지금-여기에 생동한다.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