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생명나눔, “기증 문턱 낮추고 오해 풀어야”
고령화로 기증자 감소 전망
심장사 환자는 사실상 기증 못 해
“자격 완화해 기증자 확보해야”
생명나눔은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생체 조직을 나누는 행위로 헌혈, 조혈모세포 기증, 장기기증이 대표적이다. 환자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기증을 간절히 원하지만 국내 생명나눔 참여자는 계속 줄고 있다. 특히 조혈모세포와 장기기증을 둘러싼 오해와 부정적 인식, 까다로운 기증 자격이 기증을 어렵게 하고 있다.
매년 이식 기다리다 죽는 3천 명
국내 헌혈자와 조혈모세포·장기 기증자는 모두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해 헌혈자 수는 126만4525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3만6249명 줄었다. 같은 기간 연간 헌혈 건수는 10만 건 증가했는데 이는 헌혈자 1인당 헌혈 횟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권소영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본부장은 “혈액 수급을 소수 헌혈자에게 의존하면 사람들이 ‘내가 안 해도 다른 누군가가 한다’고 단정해 혈액 수급 구조가 취약해진다”고 말했다. 고령화도 혈액 수급 전망을 어둡게 한다. 송미호 한마음혈액원 혈액관리본부장은 “헌혈에 주로 참여하는 청년 인구는 감소하고 수혈이 필요한 노령 인구는 증가해 혈액 수급이 점점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혈병과 혈액암 등 혈액 질환 치료를 위해서는 조혈모세포 이식이 꼭 필요하지만 실제 기증이 성사되는 사례는 적다. 2024년 기준 누적 42만 명이 기증등록을 마쳤고 매년 1만 명 이상 새 기증등록자가 생기지만 조혈모세포 기증사업이 시작된 1994년 이후 누적 기증 수혜자 수는 1만266명에 불과하다.
수혜자와 등록자의 *조직적합성 항원(Human Leukocyte Antigen, HLA)이 일치하지 않아 기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학적 조건도 이유 중 하나지만 기증등록을 했는데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 범수희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기증희망자은행부 팀장은 “기증등록자가 연락을 받지 않거나 기증을 거부하는 경우가 잦다”며 “HLA형이 일치해도 기증이 완료되는 비율은 절반에 못 미친다”고 말했다. 가족관계가 아닌 환자와 기증자 간 HLA형이 일치할 확률은 수천에서 수만 분의 1 수준이라 기증등록자가 기증을 거부하면 환자는 기약 없이 기다린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4년도 장기등 기증 및 이식 통계연보에 따르면 아직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지 못한 대기자 6578명의 평균 대기 기간은 7년 4개월 27일이었다.
장기기증도 대기자에 비해 기증자가 매우 적다. 2014년 2만151명이던 대기자는 2023년 4만2321명으로 10년 만에 두 배가 됐지만 기증자는 2018년 이후 500명을 밑돌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의정 갈등의 여파로 지난해 장기기증자 수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400명 밑으로 떨어졌다. 장기기증 절차에 필수인 뇌사추정자의 뇌사 판정은 전문의 등으로 이뤄진 뇌사판정위원회가 담당하는데 이외 모든 의료 업무엔 전공의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박순철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장기이식센터장은 “전공의 파업으로 의료진이 부족해 뇌사를 판정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등 업무가 원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식 대기가 길어지면서 2014년 1120명이었던 대기 중 사망자 수도 2023년 2906명으로 두 배 넘게 뛰었다. 김서진 고려대 안암병원 장기이식코디네이터는 “기증자 수는 부족한데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기증 가능 인구는 줄어들어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깐깐한 기증 자격에 나눔 미미
생명나눔 부족은 인구 구조의 변화뿐 아니라 기증 가능한 사람의 범위가 좁은 탓도 있다. 조혈모세포는 기증 희망 의사를 등록할 수 있는 연령의 상한이 만 40세다. 18세에서 40세 사이에 기증등록을 하지 않으면 조혈모세포를 기증할 수 없다. 범 팀장은 “50대에도 기증등록이 가능한 해외와 비교하면 국내 기증등록 상한 연령은 낮은 편”이라며 “기증자 확보를 위해서는 연령 제한을 완화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 영국의 조혈모세포 기증등록 연령 상한은 60세, 독일은 55세다. 헌혈자 연령 범위도 현실화해야 한다. 2008년까지 국내 헌혈자 연령 상한은 65세였으나 2009년부터는 69세로 높아졌다. 권 본부장은 “국민건강 수준이 크게 향상된 만큼 69세 이상 건강한 장년층이 헌혈에 참여할 과학적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뇌사자와 사망자만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 뇌사자의 뇌사 판정 기준과 절차, 장기 적출 요건 등은 법률에 상세히 규정돼 있지만 사망자에 속하는 심정지 사망자는 장기기증 절차와 요건이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 없다. 김해주 강남세브란스병원 장기이식코디네이터는 “뇌사자와 달리 심장사한 환자는 사망 판정 기준조차 명문화돼 있지 않아 사실상 장기기증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김동식 고려대 안암병원 장기이식센터장은 “법률 제정 당시 손상이 적은 장기만 기증받기 위해 뇌사자에 초점을 맞춘 조항이 마련됐다”며 “장기이식 성공률을 높이려는 의도였지만 장기기증자 범위를 축소해 장기이식을 위축시켰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뇌사자만 장기를 기증할 수 있는 현행 기증 체계에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Donation after Circulatory Death, DCD)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DCD는 환자 본인의 사전 동의하에 심정지 시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고 혈액 순환이 멈추면 장기를 적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1990년대 초 DCD를 도입한 미국에서는 전체 2~30% 장기기증이 심정지 사망자에게서 이뤄진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의 여러 국가도 DCD를 시행한다. 박 센터장은 “DCD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학계에서도 오랜 기간 논의됐다”며 “국내 도입 시 장기기증자가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고 말했다.
예우·교육 보완해 인식 바꿔야
생명나눔에 관한 오해도 큰 걸림돌이다. 조혈모세포는 바늘이 두꺼운 주사기를 골반에 꽂아 채취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혈모세포 중 골수는 이러한 방식으로 채취하지만 말초혈조혈모세포는 헌혈과 비슷하게 채취한다. 범 팀장은 “조혈모세포 기증 대부분 말초혈조혈모세포 기증으로 **성분 헌혈과 다름없는 절차를 거치지만 조혈모세포 기증을 고통스럽게 표현하는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통증에 관한 오해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리서치가 2023년 시행한 인식 조사에서 장기기증 의향이 없다고 한 응답자의 20%는 기증자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답변과 달리 장기기증자를 예우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오해에 가깝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장기기증자 ***장제비, 시신 이송, 추모행사, 상담 기관 연계 등을 다양하게 지원한다. 인식 개선이 요원한 이유는 과거 일부 병원의 부적절한 기증 후 대처가 크게 보도됐기 때문이다. 2017년 한 병원이 장기기증자 시신 이송을 유족에게 떠맡겨 논란을 빚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2016년 2319건이던 뇌사자 장기이식 건수는 2017년 1992건, 2018년 1768건으로 크게 감소해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김동엽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상임이사는 “사건 이후 기증자 예우가 보완됐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부정적 인식이 여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생명나눔 참여자 지원과 예우를 강화하는 다양한 해결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 범 팀장은 “조혈모세포 기증자 중 대학생이 많기에 병원 방문, 입원 등 기증 절차에 드는 시간을 자원봉사 시간으로 인정해 달라고 건의하고 있다”고 했다. 생명나눔 참여자를 존중하는 분위기도 조성돼야 한다. 김 상임이사는 “정부가 행사를 열어 기증자 유족을 위로하는 등 생명나눔에 감사를 표하는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기증이 사망자에 대한 무례라고 보는 인식도 유족의 장기기증 동의를 꺼리게 만든다. 박 센터장은 “고인의 신체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유교 기반 인식이 여전해 장기기증을 거절하는 유족이 많다”고 했다. 생명나눔의 가치에 관한 공감대도 부족하다. 손선영 대한장기이식코디네이터협회장은 “‘내가 남을 도우면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장기기증자가 늘어날 수 있는데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생명나눔에 관한 인식을 개선하려면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 송 본부장은 “미국과 영국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과서에 헌혈 관련 내용을 수록해 가르친다”며 “청소년이 헌혈을 이타적이고 일상적인 사회참여로 인식하면 헌혈 참여자가 장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울산광역시와 강원특별자치도에 헌혈 교육 관련 조례가 마련돼 있다. 김 센터장은 “생명나눔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공교육을 통한 인식 개선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직적합성 항원: 체내 면역 반응을 조절하며 장기·조혈모세포 이식 시 거부 반응 예측과 방지에 중요한 단백질.
**성분 헌혈: 혈액에서 혈장, 혈소판 등 필요한 성분만을 분리해 얻는 헌혈.
***장제비: 장례와 제사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
글 | 호경필 기자 scribeetle@
사진 | 배은준 기자 agbae@
인포그래픽 | 송민경 기자 p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