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불모지 개척하고 환자 마음 보듬는 명의
이은숙(의학과 80학번) 리리유의원 원장
주위 반대 이겨낸 외과 홍일점
유학 중 유방외과 전공 결심
“환자들, 암 걸려도 자책 말길”
‘고려대 출신 최초 여성 외과 의사’, ‘국립암센터 최초 여성 원장’ 이은숙(의학과 80학번) 리리유의원 원장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가 붙는다. 이은숙 원장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일일수록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신념으로 유방암 치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호르몬 치료제와 *유방재건술을 발전시켰고 약 20만 명의 유방암 환자와 만났다.
도전하려 선택한 ‘남초’ 외과
고등학교 시절 이과반 학생이었던 이 원장은 이과 학생 대다수가 지망하는 공과대가 아닌 의과대에 원서를 넣었다. “물리보다는 생물 공부를 더 잘했어요. 물리적 구조 파악보다는 생물의 유기성을 공부하는 게 적성에 맞았죠.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개선문>을 읽다가 나치 정권의 추격을 받던 친구를 치료해 주는 등장인물을 보며 의사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렇게 의사의 꿈을 꾸며 고려대 의과대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마냥 쉽지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 원장에게는 홀로 남동생을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그는 5년 동안 과외로 생활비를 벌고 과외 학생의 집에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했다. 돈을 버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기들과 자주 어울리지 못해 족보 없이 혼자 공부했어요. 본과 4학년은 범위가 정해지지 않은 시험을 보는데 족보를 달달 외운 게 아니라 전체 내용을 광범위하게 이해한 덕에 의과대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죠.”
졸업 후 이 원장은 내과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하나의 신체 부위만 집중적으로 치료하기보다 환자의 몸 전체를 돌보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내과야말로 적합한 학문이었죠.” 확신을 가지고 결정했지만 만성 질환을 주로 다루는 내과 특성상 환자의 질환을 의사가 완치시키긴 어려웠다. 고민하던 그는 진료과를 확정하기 한 달 전 선배의 권유로 외과를 택했다. “외과를 전공하던 선배가 장을 주로 치료하는 외과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권했어요. 수술할 때마다 터진 대장을 봐야 해 여성 의사들이 선호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개척자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죠.”
여학생이 외과에 지원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시 고려대 혜화병원 외과 의사들이 모인 의국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여학생을 받아줄 것인지 의국원 내 찬반 투표를 진행했는데 표가 절반으로 나뉘었어요. 다행히 황정웅 교수님께서 한국에서도 여자 외과 의사가 나올 때가 됐다며 설득해 주셔서 외과 전임의가 될 수 있었죠.”
홍일점이었던 그에게 외과의 근무 환경은 가혹했다. “당직실을 사용하는 사람 중 저만 여자였기 때문에 남녀 혼숙이 잦았죠. 접이식 침대에서 자고 있으면 술 먹고 들어온 선배들이 ‘차렷 열중쉬어’를 외쳐대는 바람에 번번이 잠에서 깼습니다.”
“관심 부족한 분야에 힘 보태야”
이 원장은 여성 의사라는 특수성을 살려 대장을 전공하기로 했다. “인류의 반이 여자인데, 대장항문 외과 의사 중에는 여자가 거의 없었어요. 이 분야의 의사가 되면 여성 환자들이 더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이 원장은 주목받던 대장 수술 기법인 **복강경을 연구하던 데이비드 오타(David Ota) 교수 밑에서 공부하고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로 유학을 떠났다.
오타 교수의 실험실에 합류했지만 정형화된 연구에 흥미가 떨어진 그는 다른 실험실을 찾았다. “오타 교수의 연구실은 화학 임상 실험을 주로 진행했어요. 화학은 오래된 학문이라 참신한 실험을 하긴 어려웠죠. 대신 떠오르던 분자 생물학 관련 실험을 할 수 있는 유전자 변형 쥐 실험실을 선택했습니다.”
연구에 매진하던 이 원장은 귀국 3개월 전 미국의 한 병원에서 유방암 진료 현장을 보고 한국의 열악한 유방암 의료 수준을 깨달았다. “종양혈액내과, 방사선종양학과, 영상의학과 등 여러 진료과 의사가 한 팀으로 유방암 환자를 진료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유방암을 심도 있게 치료하지 않았죠.” 그는 한국에 선진 유방암 의료를 들여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세부 전공을 유방외과로 정했다. “미국과 같은 진료 환경을 조성하고 싶었어요. 관심과 지원이 부족할수록 누군가는 힘을 보태야 하니까요.”
귀국 후 이 원장은 고려대 안암병원 유방내분비외과에서 조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유방암 수술을 집도하며 암 제거뿐 아니라 유방 모양 보전에도 신경 썼다. “수술 전과 후 모습의 차이가 클수록 환자의 자존감이 떨어져요. 수술 과정에서 어떻게 상처를 내야 유방 모양을 최대한 보전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죠.” 그는 여성호르몬을 차단해 암의 성장을 억제하는 호르몬 치료제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여성호르몬이 유방암 발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호르몬 치료제의 내성을 집중 연구했어요. 유전자 변형 쥐 실험실에서 기초 연구 역량을 쌓은 게 많은 도움이 됐죠.”
환자에게 먼저 손 내미는 의사
2000년, 이 원장은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으로 임명된 박재갑 교수의 제안으로 국립암센터 개원에 참여했다. “당시 고려대 의료원에는 암센터가 없었고 유방암 연구 지원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암센터에 가면 더 많은 유방암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테니 주저 않고 수락했죠.” 유방암센터에 합류한 그는 풍부한 경력을 갖춘 동료 덕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박재갑 원장님은 대장외과 명의셨고 이진수 폐암센터 원장님도 권위자셨어요. 경력 부족을 확실히 느낀 덕에 유방암 치료와 연구를 더 열심히 했죠.”
유방암 치료와 연구에 전념하던 이 원장은 연간 500여 건의 유방암 수술을 집도하고 유방재건술을 연구한 성과를 인정받아 국립암센터 7대 원장으로 임명됐다. 암센터의 수장이 된 그는 개척 정신을 발휘해 희귀·난치암 연구를 전폭 지원했다. “희귀·난치암은 수익성이 낮아 치료하는 병원이 적었어요. 연구를 활성화하면 점차 진료 병원이 많아질 거라 기대하고 환자 데이터를 모으기 위한 데이터 센터를 설립했죠. 센터에서 쌓인 데이터가 향후 희귀·난치암 치료의 기반이 됐습니다.”
암센터 원장이 된 지 3년째 되던 해 코로나19가 창궐했다. 암세포뿐 아니라 코로나19로부터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고 공공 의료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집중했다. “국립암센터 안에 코로나 중증 환자를 돌보는 입원실을 만들었어요. 암 환자든 아니든 코로나 검사를 해주고 코로나에 걸린 사람을 수용했죠. 국제암연맹 등 해외 기관과 화상 회의를 하며 코로나 대응 요령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원장 임기를 마친 이 원장은 거취를 고민하다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이찬화 영상의학과 전문의의 제안에 유방암 전문 병원인 리리유의원을 개원했다. “개원은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었지만 개인 병원에서는 환자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짐작했죠. 환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찾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원장은 암 치료뿐 아니라 환자의 심리적 불안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유방암은 완치 후에도 재발이 잦고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어 환자가 치료받는 중에도 불안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진행성 유방암을 앓던 대학교 2학년 학생 환자가 기억에 남아요.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나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칩거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암을 치료한 후 두려워하기보다 새로운 일상을 살면 된다고 조언하니 의지를 갖고 치료에 임했죠. 완치 후 유학길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잘 이겨낸 환자가 대견했습니다.”
주변의 시선도 유방암 환자를 힘들게 한다. “그 학생을 마지막으로 본 지 7년이 지났을 무렵 유방암이 재발해서 다시 찾아왔어요. 암에 걸린 게 잘못이 아닌데도 시댁 식구들에게 숨기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죠.” 이 원장은 암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사회적 환경이 정착하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암을 거리낌 없이 밝히고 암과 치료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합니다. 재발하더라도 생활과 치료를 병행하며 일상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요.”
이 원장은 여전히 환자를 만나며 의사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계속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는 청년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의를 품으라 조언한다. “젊은이들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일에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걷는다면 세상을 이롭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유방재건술: 유방암 수술로 변한 유방 모양을 보형물이나 자가 조직 등으로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기법.
**복강경: 배꼽부위 복부에 작은 구멍을 여러 개 내고 그 안에 비디오카메라와 각종 기구를 넣어 수술하는 기법.
글 | 최소은 기자 soeun@
사진 | 박인표 기자 inpyo902@
사진제공 | 이은숙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