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에서 다시 창조된 기원전 로마

개교 120주년 기념 연극 <코리올라누스>

2025-09-15     홍예원 기자

현대 배경과 융합된 셰익스피어 비극

50년 차이 선·후배가 꾸민 무대

미디어 연출로 기원전 재구성

 

개교 120주년 기념 연극 '코리올라누스'의 한 장면.

 

  고려대 개교 120주년 기념 연극 공연 <코리올라누스>가 지난 6일부터 14일까지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202에서 열렸다. 고려대가 주최하고 고대극회(이사장=이현우)가 주관한 이번 연극은 고대극회와 극예술연구회(회장=허윤영)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비극 <코리올라누스>를 미디어와 접목하며 탄생했다. 이날 공연에는 73학번부터 25학번까지 다양한 세대의 교우와 재학생 배우들이 참여했다. 

  <코리올라누스>는 로마 공화정 초기 전쟁 영웅 카이우스 마르키우스(Gaius Marcius)의 비극적 몰락을 다룬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이다. 주인공 마르키우스는 볼스키 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코리올라누스라는 칭호를 얻지만 오만한 성격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된다. 분노한 그는 볼스키 족과 손잡고 로마를 공격하나 가족의 간청에 화해를 택하고 결국 배신자로 몰려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주인공 마르키우스는 극 중에서 영웅이 되기도 하고 반역자가 되기도 하며 적국과 동맹을 맺었다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연출을 맡은 이현우(순천향대 영미학과) 교수는 “<코리올라누스>가 우리나라의 역동적인 역사와 함께하며 사회의 움직임을 선도해 온 고려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고대극회의 <코리올라누스>는 극 중 영웅에서 반역자로 추락하는 코리올라누스의 서사를 미디어가 선동하고 왜곡하는 현대 사회 정치에 빗대 담아냈다. 조승현 고대극회 동우회장은 “고대극회는 개인과 국가, 부조리와 권력의 본성에 관한 연극을 추구해 왔다”며 “이런 대작을 공연할 수 있는 고대극회의 열정과 연극 사랑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 교수는 “셰익스피어는 400년 전의 작가이지만 오늘날에 공명하는 메시지를 가진다”며 “고대극회의 이번 공연을 통해 현시대의 문제를 느끼고 그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고대인의 목소리를 발견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대극회는 10년마다 개교기념 공연을 올리고 있다.

 

  단순한 고전극의 재현을 넘어 미디어를 활용해 시공간을 뒤섞는 새로운 연출도 선보였다. 극에는 고대 로마의 의상과 함께 검은 방탄복, 기관총, 휴대폰 등의 현대적 소품이 등장했고 민중이 봉기하는 장면에서는 세계 각지의 시위 현장을 담은 영상이 무대 배경을 채웠다. 미디어 소품을 활용해 관객들의 몰입을 돕는 연출도 시도됐다. 무대 전면에 설치된 대형 LED 화면에서는 무대 위의 배우, 무대 뒤의 대기실, 객석의 관객들이 실시간으로 송출됐다. 이 교수는 “관객이 전쟁의 현장에 놓인 민중의 일부가 된 듯 몰입하길 원했다”며 “역사는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재현되고 왜곡되는 가공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무대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에는 예수정(독어독문학과 73학번) 교우, 이성용(체육교육과 76학번) 교우, 황건(노어노문학과 98학번) 교우 등 고대극회 출신의 관록 있는 배우들이 출연했다. 민중의 어머니 역을 맡은 성병숙(임학과 73학번) 배우와 호민관 역을 맡은 서송희 배우 모녀는 이번 공연으로 6년 만에 한 무대에 섰다.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 중인 재학생 배우들도 대선배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제작총괄을 맡은 이영훈(사회학과 79학번) 교우는 “이번 공연은 바쁜 일정에도 출연을 결정해 준 선배들과 열정으로 가득한 재학생 후배들이 쌓아 올린 땀의 결정체”라고 했다. 메네니우스 아그리파 역으로 출연한 이성용 교우는 “고대극회는 한국 연극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유서 깊은 동아리인 만큼 선후배가 함께한 이번 공연의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공연장 로비는 교우와 재학생들로 북적였다. 이순천(법학과 72학번) 교우는 “고대극회 출신 지인이 많아 120주년을 함께 기념할 겸 단체 관람을 제안했다”며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재의 정치 및 사회와 관련이 깊어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 고대극회 배우로 활동했던 정진형(심리학과 74학번) 교우는 “이번 공연을 보기 위해 대구에서 올라왔다”며 “학창 시절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개교 120주년을 맞아 선후배가 함께 공연하는 모습에 감회가 남달랐다”고 말했다. 공연 기획에 참여한 박연우(문과대 철학23) 씨는 “수십 년 나이 차이가 나는 선배님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며 새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글 | 홍예원 기자 esotsm@

사진제공 | 고대극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