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의 야구 사랑, 통찰에 열정을 더하다
김수인(사학과 73학번) 최동원 후원회장
야구 사랑이 평생 직업으로
날카로운 분석 담은 칼럼
“요행 바라지 말고 열정 다해야”
김수인(사학과 73학번) 최동원 후원회장은 23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치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야구계와 언론계에 몸담고 있다. 냉철한 분석을 위해서라면 스포츠부터 경제, 의학까지 공부하는 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야구로 책을 펴내고 글을 쓴다는 것은 큰 축복이에요. 영원한 야구기자로 남고 싶습니다.”
열정 넘치던 꼬마 야구박사
김 후원회장은 유년 시절 사회인 야구를 즐기던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아 멀리 놀러 갈 수 없었어요. 아버지 따라 부산에 있는 구덕야구장에 방문하는 게 유년 시절 유일한 낙이었죠.” 자연스레 야구를 가까이한 김 후원회장은 명문 야구부가 있는 부산 경남중학교에 진학하며 야구에 푹 빠졌다. “구덕야구장에서는 전국고교야구대회 화랑대기가 매년 열렸어요. 대회가 진행된 8일간 거의 모든 경기를 보며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렸죠.” 야구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항상 이렇게 답한다. “야구가 왜 좋냐고요? 부산 사람의 야구 사랑은 당연한겁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김 후원회장에게 야구가 최고의 친구였다면 신문은 최고의 스승이었다. “중학생 시절 부모님께서 독재 정권에 맞서던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계셔서 신문을 자주 접했어요. 매일 기사를 정독하다 보니 사회의 목탁 역할을 하는 기자를 동경하게 됐죠. 글쓰기를 좋아하는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았습니다.” 기자의 꿈을 키우던 그는 고등학교 입학 후 신문 동아리에 들어갔다. “학업보다 신문 만들기에 열중했어요. 교내에서 반별 야구 대회를 직접 개최해 보도했죠. 2학년 때 신문반장을 하며 한양대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신문 콘테스트에 참여해 비수도권 고등학교 최초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려대에 입학한 김 후원회장에게 고대신문에서의 취재 경험은 기자로서의 자양분이 됐다. “정기고연전 하루 전날 본관 옥상에 걸린 연세대 교기를 목격했어요. 양교의 교류 행사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연세대 학생이 본관에 무단 침입해 깃발을 바꿔 단 희대의 사건을 목격한거였어요. 기삿거리를 놓친 후 일상 속 모든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한 수준 높은 기사로 동료와 선배 기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직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됐을 때 관련 보도를 종합해 해설 기사를 작성했어요. 편집국장님께 기성 언론보다 낫다는 칭찬을 받아 뿌듯했죠.” 부장직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가정 형편 상 1년 활동 후 그만둬야 했다.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등록금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부모님 말씀에 입대를 결정했죠. 전역 후 복직을 제안받았지만 후배들이 불편할까 교우회보에서 학내 언론인 생활을 이어갔어요. 편집국장을 하지 못한 건 평생의 한이죠.” 김 후원회장은 현재 백구회로 이름이 바뀐 고려대 중앙야구 동아리 고대 타이거즈의 창립 주역이기도하다. “문과대 후배들과 함께 야구 동아리를 결성했는데 종목 특성상 장비가 많고 복잡해 운영이 어려웠어요. 제가 졸업하면 금방 사라질까 봐 직접 학생처로 가 중앙동아리로 등록했죠. 선·후배 간 교류가 끊이지 않고 큰 규모로 성장해 아주 뜻깊습니다.”
편집국에서 다시 만난 야구
김 후원회장은 졸업 후 여러 종합일간지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모두 떨어졌죠.” 현실의 벽에 부딪힌 그는 방위산업체인 풍산금속에서 영업부 사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회사에서 일하다 우연히 상사 책상 위에 놓인 매일경제 1면을 봤어요. 그때만 해도 매일경제는 인지도가 낮아 기업체 주요 직원에게 신문을 자주 나눠줬죠. 신문에 실린 기자 모집 공고를 보고 ‘일단 무슨 기자든 되고 보자’며 지원했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첫 기자 생활은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다. 선후배와 동료 기자들의 전문성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문장력이 좋지 않고 부장의 편집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담당 부장이 ‘글은 무조건 짧아야 좋다’며 기사를 잘라냈는데 억울한 마음에 몰래 수정했다가 발각돼 주간국으로 쫓겨났죠.” 한직으로 밀려난 뒤 이직한 서울신문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당시 집권 정당이던 민주정의당의 당보나 다름없었어요. 고대생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죠. 사내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돼 불의와 맞섰지만 회사가 압박하며 이직을 종용해 다른 직장을 찾아야 했습니다.” 1986년, 때마침 스포츠서울이 창간하며 기자를 채용하자 김후원회장은 지원을 결심했다. 33세의 나이에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야구를 직접 취재하게 된 것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였지만 좋아하던 야구 일을 할 수 있으니 힘든 줄도 모르고 구단과 구장을 드나들었죠.” 그는 스포츠조선 체육부 차장, 야구부장, 야구대기자를 역임하며 ‘야구 박사’로 거듭났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농담 삼아 김영삼 대통령의 시구를 제안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진짜로 시구를 한다고 연락이 왔죠. 스포츠 기자로선 처음 대통령 동정 특종을 따냈습니다.
특종의 기쁨 만큼이나 낙종의 아쉬움이 큰 날도 있었다. “사직구장 경기 취재를 마친 후 구단 숙소에서 코치들과 밤새 어울렸어요. 이튿날 일어나보니 제 이름으로 된 관중 사망 기사가 1면에 실렸더라고요.” 쓴 적 없는 기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올라갔다는 황당함은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알고 보니 관중 1명이 경기 중 고함을 치다 쓰러져 결국 사망했죠. 동료가 9시 뉴스로 사건을 확인하고 기사를 대신 써줬다고 말하는데, 모욕감과 창피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이후 그는 언론계에 몸 담으며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했다. “어떤 취재든 예의와 열정을 갖춰야 해요. 열정 없이 편하게만 하려고 하면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없더라고요. 철저한 준비와 예의를 바탕으로 직접 땀 흘린 취재의 결실이 가장 값진 기사를 낳는다고 믿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이어가는 열정
2000년대 초 인터넷 보급으로 스포츠신문이 쇠퇴하자 김 후원회장은 홍보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 기자 생활로 언론계에 넓은 인맥이 있었지만 인연을 활용한 편법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특히 기자들이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정석을 고수하면서도 열정적인 홍보 활동을 한 그는 홍보계의 그랜드슬램이라 불리는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에 모두 담당 기사를 올려냈다. “부단한 노력으로 업계에선 극히 드문 성과를 냈어요. 요행을 바라지 않은 덕에 해낼 수 있었죠.” 이후 KT스포츠로 이직해 홍보 임원으로서 KT 위즈의 창단을 지원하기도 했다. “KT 위즈 창단 초기 일부 언론사가 신생구단이라며 홀대하고 무시하기도 했어요. 언론사 경력이 길어 대선배 격인 제가 홍보 담당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니 환대해 주셨죠.” 신문사를 떠난 김 후원회장은 칼럼니스트로서 언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분석력을 바탕으로 예리한 분석을 담은 전문 야구 칼럼을 주로 쓴다.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전략이나 시프트를 이해하려 경기 하나 하나를 철저히 분석해요. 투수가 던지는 변화구 원리를 이해하려 과학을 공부하기도 했죠.” 2013년 골프로 전문 분야를 넓힌 후에도 특유의 통찰력을 잃지 않았다. “박인비 선수가 그랜드슬램을 눈앞에 두고 협찬사의 요청으로 급히 귀국하며 성적이 급락해 수상에 실패한 적이 있어요. 골프는 피로 관리가 중요한 스포츠인데 당시에는 이를 지적하는 칼럼이 없었죠. 전공 분야는 아니었지만 문제를 짚어야겠다고 판단해 골프칼럼을 썼는데 반응이 좋아 정기적으로 연재하게 됐어요.”
김 후원회장은 어느덧 일흔이 넘은 고령의 칼럼니스트가 됐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다. “여러 신문을 정기 구독해 스크랩북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 신문으로 모은 정보와 수사를 제 글에도 녹여내려 노력하죠.” 칼럼 특성상 오래 몸담은 언론계를 비판해야 할 때도 많지만 그에게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기분보다 사실과 소신이 우선해야 해요.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면 주변 반응에 개의치 않고 제 견해를 그대로 표현하려 하죠. ”3월부터 최동원기념사업회 산하 최동원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청년들이 최동원 정신을 새겨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경남고 후배인 최동원 선수를 오래 봐왔어요. 최 선수는 항상 군말 없이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했죠. ‘한번 해 보입시다’라는 말에 담긴 그의 투지와 도전 정신을 널리 알려 사회에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45년간 언론인으로 살아온 김 후원회장은 후배들에게 꾸준한 노력을 당부한다. “휴대전화를 구부정하게 들여다보는 사소한 습관이 큰 병고로 돌아오듯 과거가 쌓여 미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열심히 살다 보면 뭐든 돼 있을 겁니다. 저도 줄기차게 노력했을 뿐인데 어느새 최고령 칼럼니스트라는 말을 듣고 있네요.”
글 | 유병현 기자 bluehouse@
사진 | 한예리 기자 dppf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