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쌀롱] ‘안녕’이라고 (두 번)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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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1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문학동네, 2025) 읽기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동명의 소설집(문학동네, 2025)에 실린 단편이다. 꼭 20년 전에 작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가 세상에 나왔다. 가진 것 없는, 하지만 선량한 청년들의 입사식(入社式)을 다감하게 그려내던 작가의 시선이 한층 더 넓고 깊어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40대 중반,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다. 삶은 청년에게도, 중년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아름답던 시절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는다.  

  소설 속 ‘나’는 어머니 간병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긴 고립의 시간을 견뎠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원어민 강사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어학 수업을 듣게 되는데, 대화 속에서 ‘안녕’이라는 단어의 복합적 의미를 곱씹게 된다. ‘나’는 옛 연인 헌수와 들었던 팝송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Love Hurts’를 듣다가 “안녕”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노래를 부른 가수가 한국어 ‘안녕’을 가사 속에 섞어 넣은 것이라 생각했다. 헌수는 ‘나’가 “I’m young”[암 영]이라는 가사를 잘못 들은 것이라고 교정해준다. 안녕. 그것은 만남과 헤어짐을 뜻하는 인사말을 넘어,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된다. 헌수 역시 긴 돌봄의 시간을 보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어머니를 도와) 간호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아버지 사후, 폐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간호해야 했다. ‘나’의 간병 생활이 시작될 때, 헌수는 ‘나’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배웠다.  

  부모의 이혼, 투병, 그로 인한 실직과 가난은 삶이 ‘나’에게 부과한 짐이지만, 그 짐을 거부하거나 쉽사리 벗어버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독자는 묵묵히 ‘나’와 헌수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문득 ‘삶이 나에게도 그런 짐을 지운다면?’이라고 자문하게 된다. 그것을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외국인 강사 로버트는 ‘나’에게 한국어 “안녕”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 ‘나’는 안녕에는 인사와 작별, 이중의 뜻이 있다고 답한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나’는 안녕에는 하나의 뜻이 더 있다고 말해준다. 바로 ‘평안’이라는 뜻. ‘나’가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고 로버트가 대답하려는 순간, 화면이 꺼진다. 하지만 ‘나’는 안다. 로버트가 안녕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부디 평안하라고 ‘나’에게 축복을 건넸을 것이라고. 이 마지막 인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위안한다. 막막한 삶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에게 건네는 의례적 인사가 상대를 ‘축복하는 의례’로 전환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소설 속 음악은 언어적 오해의 순간을 엮어내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잘못 들린 “암 영”은 한국어 “안녕”과 겹치고, 언어적 실수가 아니라 시간(기억), 언어, 정동을 결합하는 네트워크적 사건이 된다. 네트워크 안에서 음악은 문자와 언어, 기억과 관계를 잇는 행위자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안녕. 메마른 세상에서 우리, 서로에게 이렇게 간절히, 필사적으로 안녕을 건네보자고. 그리고 안녕은 언제나 메아리처럼 응답을 부른다. 그래서 안녕은 언제나 두 번 발음된다. 안녕. 안녕.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