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콘텐츠, 편견 너머의 성소수자 그리려면

2025-09-21     박효빈 기자

퀴어 포용하는 분위기 조성 도와

남장여자물, 퀴어 서사만 빌려

“다양한 캐릭터·서사 등장해야”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상 콘텐츠가 주목을 받고 있다. 캠퍼스를 배경으로 게이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 <시맨틱 에러>는 공개 직후 왓챠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스핀오프 예능과 극장판까지 제작됐다. 입시 경쟁이 치열한 고등학교에서 펼쳐지는 여학생 간 사랑을 그린 드라마 <선의의 경쟁>도 공개 직후 티빙과 왓챠에서 나란히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영화가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사회 분위기 형성을 이끌 수 있지만 실제와 다르거나 과장된 묘사는 성소수자를 향한 편견을 강화한다. 바람직한 퀴어 재현을 위해서는 다양한 성소수자 캐릭터를 발굴하고 퀴어의 사랑도 이성애와 다름없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OTT가 주도한 퀴어 흥행

  퀴어를 소재로 삼는 콘텐츠 제작·방영의 중심에는 OTT(Over-the-top)가 있다. 티빙은 소설 원작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을 단독 방영했고 왓챠는 <하숙집 오!번지>, <비의도적 연애담> 등 BL(Boys Love) 드라마를 선보였다. 박지훈(미디어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소수의 취향에 맞춘 콘텐츠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OTT는 퀴어 콘텐츠 제작과 방영을 비교적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다”고 했다. 전 세계 시청자에게 콘텐츠를 공급하는 OTT의 특성도 퀴어 소재가 많은 시청자를 사로잡은 일등공신이다. 노동렬(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미국, 영국 등 해외 시청자는 한국 시청자보다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아 오래전부터 콘텐츠화했다”며 “이 덕분에 콘텐츠 제작자가 퀴어 소재를 택하는 부담이 적다”고 했다. 실제로 <선의의 경쟁>은 일본·대만·태국의 OTT에서 차트 1위를 차지했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중국의 평점 사이트 더우반에서 8.9점을 받는 등 호평을 받았다.

  OTT에서 두각을 나타낸 BL과 GL(Girls Love) 장르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깊이 다루기보다는 오락적 재미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기존 퀴어 콘텐츠와 구분된다. 21세 여성 A씨는 “쏟아지는 이성애 로맨스 콘텐츠에 비하면 BL·GL은 흔한 사랑 이야기라도 독특하게 느껴져 재미있다”며 “동성 간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를 더 개연성 있게 표현되는 것도 매력”이라고 했다. 특히 BL은 이성 간 폭력 묘사가 적고 섬세한 남성 캐릭터가 등장해 ‘여성 팬을 위해 특화된 장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 교수는 “BL은 젠더 감수성이 높은 젊은 여성이 남성과 여성 간 위력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로맨스를 즐길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동윤 영화 평론가는 “이성애자 남성 캐릭터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섬세한 감정선, 관계의 밀도가 나타난다”고 했다.

  TV 드라마에도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기성세대가 주로 시청하는 탓에 소극적으로 활용된다. 노 교수는 “TV의 주 시청층이 40대에서 60대 중장년층이기에 퀴어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를 방영하면 시청률을 포기하는 셈”이라며 “성소수자 캐릭터는 부수적 역할로 등장하거나 하나의 에피소드에만 출연하는 등 가볍게 다뤄진다”고 했다. 방송사는 성소수자 캐릭터 등장으로 인한 시청자 반발을 의식해 비중을 줄이기도 한다. 2010년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례적으로 동성 커플의 서사를 다뤘지만 시청자 반발로 게이 커플의 언약식 장면이 통편집됐다. 최근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정년이>는 원작 웹툰을 각색하면서 레즈비언 캐릭터 권부용을 삭제했다.

  퀴어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하지만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유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관용적 태도가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동성결혼 법제화에 찬성하는 비율은 2001년 17%에서 2023년 40%로 상승했다. 특히 20대의 찬성률은 64%로 전 세대 중 가장 높았다. 박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과거보다 성소수자를 우호적으로 바라본다”며 “특히 20대는 포용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여겨 더욱 관용적”이라고 분석했다.

  퀴어를 소재로 한 드라마·영화가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시청한 김도경(중앙대 약학25) 씨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주인공의 고통에 공감했고 성지향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보게 됐다”고 했다. 심기용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 활동가는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늘면서 만들어진 퀴어 콘텐츠가 다시 이해와 포용을 확산시키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퀴어 콘텐츠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긍정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시청한 퀴어 여성 B씨는 “비주류 캐릭터가 서로를 응원하고 연대하며 주류 사회에 도전하는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동성애자 남성 C씨는 “청소년 퀴어가 겪는 차별과 슬픔을 그린 한국 퀴어 영화를 보며 많이 위로받았다”고 했다.

 

  고민 없는 재현이 편견 낳아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윤윤제는 자신에게 고백한 강준희를 백허그로 떠나보낸다. 윤제와 여주인공의 사랑을 응원하며 물러나는 준희의 서사를 두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성소수자 캐릭터를 이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영화·드라마가 퀴어 소재를 사용한 역사는 짧지 않지만 성소수자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본 작품은 많지 않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구르미 그린 달빛> 등 동성애 코드가 가미된 소위 남장여자물이 활발히 제작됐다. 이 평론가는 “남성 주인공이 상대를 남성으로 인지하는 상태에서 사랑을 느끼는 대목은 성별과 무관하게 사람 자체에 끌릴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여성을 남성으로 오해한다는 설정 덕에 시청자는 동성애 감정선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했다. 

  남장여자물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 퀴어를 소개했지만 여성 주인공의 성별이 드러난 후 이어지는 결말 때문에 비판받는다. 박 교수는 “남장여자물은 퀴어 서사를 차용하면서도 이성애로 귀결되기에 시청자에게 동성애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줘 이성애 규범주의를 강화한다”고 말했다. 이 평론가도 “끌림을 느낀 상대가 이성으로 밝혀지는 결말은 동성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전제한다”며 “퀴어 서사 활용에 그칠 뿐 퀴어를 재현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퀴어 캐릭터는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도 자주 쓰인다. 2021년 드라마 <빈센조>의 악역 황민성은 남성 주인공을 좋아하는 감초 역할로 등장한다.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조연 강준희는 이성애자 남성 주인공 윤윤제를 짝사랑한다. 마지막 화에는 윤제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 준희에게 윤제가 백허그로 작별 인사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평론가는 “준희는 주인공 윤제가 성소수자에게도 편견 없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다”며 “성소수자는 늘 다수자에게 이해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라는 편견을 재생산한다”고 평했다.

  성소수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 표현 방식도 마찬가지다. 2017년 방영된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게이 조연 오돌뼈는 짙은 화장을 한 채 과장된 행동을 보인다. 드라마를 시청한 D씨는 “등장인물 중 오돌뼈만 직장에서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어 성소수자를 희화화한다고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C씨는 “오돌뼈처럼 소위 끼순이라고 불리는 게이는 일부인데 극단적으로 표현해 개그 소재로만 활용됐다”며 “성소수자가 겪는 아픔에는 무관심하면서 흥밋거리로만 삼는 시각이 불쾌했다”고 말했다. 희화화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 평론가는 “매체에서 왜곡된 성소수자를 자주 접한 대중은 그 모습이 사실이라고 착각해 현실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혐오를 도외시할 수 있다”고 했다.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속 게이 캐릭터 오돌뼈의 과장된 차림새와 말투는 방영 당시 '웃음 포인트'였다. 희화화가 성소수자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고정관념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퀴어도 평범한 이웃으로 그려야

  성소수자를 입체적으로 재현하려면 퀴어 소재 콘텐츠 제작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 교수는 “퀴어 캐릭터가 적고 유형도 한정돼 있다 보니 매체에 나오는 캐릭터가 퀴어 전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진다”며 “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야 성소수자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도 넓어진다”고 말했다. 심 활동가는 “최근 BL 콘텐츠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동성애를 다양하게 재현하고 연기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고 했다.

  성소수자 혐오 여론을 의식해 캐릭터를 삭제하거나 비중을 줄이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심 활동가는 “유명 배우가 게이 역할을 맡은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게 벌써 10여 년 전”이라며 “성소수자가 나오면 작품이 실패한다는 주장의 반례가 많아지는 만큼 부정적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성소수자를 비정상이나 특이한 존재로 그리는 관행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 교수는 “해외 드라마는 캐릭터가 퀴어라는 사실을 반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며 “성소수자가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B씨는 “사회는 퀴어 로맨스를 특이하다고 보지만 사랑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주류와 다르지 않다”며 “퀴어의 사랑을 타자화하지 말고 평범하게 다루면 좋겠다”고 말했다.

  콘텐츠 속 퀴어가 일상을 나타내는 장치로 자리 잡으려면 성소수자의 현실과 목소리를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는 평이다. 심 활동가는 “성소수자 재현이 꼭 현실적일 필요는 없지만 다양한 감정과 사정을 지닌 인간으로 존중하고 작품의 파장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글 | 박효빈 기자 binthere@

인포그래픽 | 송민경 기자 pull@

이미지출처 | 티빙, 힘쎈여자 도봉순 공식 홈페이지